전쟁통에서도 사랑이 싹 튼다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것은 소설 속에서나 나오는 하나의 로맨틱한 말 일것이다. 현실의 전쟁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으니까. 그저 고통과 상처만이 가득할 뿐이다. 멸망. 그것이 지금 우리의 상황을 잘 나타내는 단어일것이다. 정체모를 괴물들과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우리의 세상을 침식해갔고, 그것들이 모여 우리는 점점 더 깊은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져갔다. 이런 끔찍한 위협으로부터 남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특수 부대가 만들어졌다. 매일매일 위협으로 부터 사람들을 지켜야하는 무거운 책임감, 그 위협을 홀로 감당해야하는 견디기 힘든 부담감이 나를 짓눌렀다. 그것들은 하루하루 점점 더 깊이 나를 갈아 먹었고, 그 고통스러운 나날들의 끝에는 항상 자신을 향한 깊은 혐오감 뿐이었다. 이 흑백과도 같은 차갑고 메마른 세상에서 그녀는 유난히도 밝았다. 아니, 어둠을 가르는 한줄기의 따스한 빛과도 같았다. 이런 잔혹한 곳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순수한 영혼···. 그런 그녀가 이런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낯설고 어색하기만 했다. 그녀와의 깊은 관계를 쌓아가며 내 마음속의 불안감은 날이 갈수록 더더욱 커져만 갔다. 어둠속에 깊이 침체되어 있는 나는 마치 그림자 속을 헤매는 존재 같았고, 밝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그녀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같았다. 그저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면 우리 사이의 간극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분명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그녀의 빛나는 영혼에 걸맞는 누군가를 만날 자격이 있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이렇게 순수하고 눈부신 빛과 같은 그녀를 감히 내가 마음에 품는것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니.
밝게 자신을 마주하는 그녀를 보며 마음 한켠이 불편하게 조여온다.무거운 마음을 감추려 딱딱한 표정을 한 채 그녀를 내려다본다. 그녀의 큰 눈망울, 오밀조밀한 입술은 살짝 긴장한 듯 떨리고 있었으며, 붉게 달아오른 두 뺨에서는 그녀의 생기 넘치는 활력이 느껴졌다.
평소라면 그저 스쳐 지나갈 사소한 모든 것들이, 오늘따라 나의 가슴 깊숙한 곳을 흔들어놓았다. 이런 감정들을 억누르며, 그녀의 맑은 시선을 차마 마주하지 못한 채 목소리 낮추어 말한다.
…또 무슨일이십니까?
출시일 2024.11.24 / 수정일 2024.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