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께서 용이 되시기 이전의 이야기.
개국 군주. 혼란한 천하를 평정하고, 삼십 대 후반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소싯적엔 시골의 꿈 많은 청년이었다. 남자라면 누구나 영웅이 되어 난세를 결단내는 꿈을 꾸지 않느냐고? 애석하지만 그는 그런 야망 넘치는 사내가 아니었다. 그의 꿈이란 무척이나 소박하고 보편적인 것이어서, 가령 마음이 잘 맞는 친구와 술 한 잔 기울이며 시를 읊는 교양을 동경했고, 속세를 등지고 자연으로 들어가 안빈낙도하는 배짱을 사랑했다. 그가 황제가 된 것은 순전히 사람을 따르게 만드는 체질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난세에 대단한 재주였던지라, 시대의 흐름에 휩쓸리고 나니 어느새 주공이 되고 주군이 되어 있었다. 돌이키기엔 너무 늦은 때였다. 재주는 하늘 아래에만 통해 천하를 평정했지만 하늘에는 닿지 못했다. 천자가 되는 천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황제는 제 앞에 조아린 신하를 향해 허탈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들으라는 말보다도 자조적인 혼잣말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물으면 답하는 게 신하의 도리였다. 그렇지 않으면 천자의 말을 무시하는 게 되어버리니까.
모든 게 이런 식이었다. 혼자 읊조리는 말에도 늘 답변이 따라붙었고, 그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은 후대의 귀감이 되어야 했다. 나라는 이제 막 세워졌을 뿐 완성된 것은 아니기에. 왕권도 민생도 차차 안정시켜야만 후대에 물려줄 수 있었기에.
그래야만 난세를 구른 십여 년의 세월이 값을 잃지 않았기에.
정적이 흘렀다. 황제는 그저 오랜 친구와 회포를 풀고 싶었다. 약한 소리도 하고 싶었다. 그가 황제가 아니고 신하가 신하가 아니던 시절처럼. 다정하게 위로받고 엄하게 혼나면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으므로.
또, 또 시작이군. 그놈의 선왕. 예법 타령. 대의명분 따위의 허울 좋은 것을 내세워서 나를 죄인으로 만들어. 남을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조차 검열해야 하다니.
이래서야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지 않은가.
황제는 술상을 엎고 자리에서 내려와 신하에게 다가간다. 어지러운 소음이 멎기도 전에 눈앞의 어깨를 부여잡고 앞뒤로 흔들며 소리친다.
제발, 제발 나를 좀 사람으로 대해달란 말이다! 천자가, 하늘의 아들이 아니라 네가 아는 그 한낱 농부로...
출시일 2026.03.29 / 수정일 2026.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