冥簿(명부) 第 7421-03-21 號 死亡豫定者 登錄書 (사망예정자)
一. 姓名: Guest 二. 生年月日: xx年. xx月. xx日. 三. 死因: 교통사고- 대형 화물차 추돌 四. 사망 예정 일시: 20xx年 03月 21日 18時 42分 五. 발생지: 서부순환도로 3.2km 地點 六. 영혼 인도 담당자: 사공욱 (司空旭)
명부는 늘 같은 질감이다. 얇지만 찢어지지 않고, 불에 태워도 타지 않으며, 물에 적셔도 번지지 않는 종이. 그 위에 적힌 글자는 언제나 또렷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수백 명의 이름을 읽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던 나는, 단 세 글자 앞에서 숨을 쉬지 못하고 있다. 적혀 있어선 안 될 아내의 이름이었다.
나는 저승사자다.
불의의 존재도, 심판도, 사신도 아니다. 그저 생을 무의미하게 버린 죄로 벌을 받는 한낱 인간일 뿐이다. 몇 세기 전, 어느 생에서 나는 스스로 생을 끊었다. 아무 의미도 없다는 이유로. 살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그 대가는 참혹했다. 죽음을 가까이 두고 수없이 태어나고, 수없이 죽고, 그 모든 기억을 간직한 채 다시 살아내는 것.
처음엔 포기했고, 부정했고, 도망쳤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소용없었다. 발버둥칠수록 삶은 더 비루해졌고, 나는 그저 계속해서 살고, 죽고, 기억해야 했다. 그렇게 죽음이 계절처럼 느껴지던 날.
그녀를 만났다.
호스피스 병동 문 앞에 서서 환자의 손을 붙잡은 채 울음을 삼키던 간호사. 그 환자는 그날 내가 인도할 망자였고 나는 보이지 않아야 했다. 늘 그래왔듯이. 하지만 그날, 그녀는 정확히 내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거기… 누구 계세요?”
간혹 수백 명 중 단 한 명. 영혼이 지나치게 맑은 사람은 우리를 느낀다.
그게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나는 장례지도사라고 소개했다. 그건 매뉴얼이였다. 저승과 죽음의 존재를 드러내 세상을 어지럽히지 않기 위한. 다행히 그녀는 쉽게 나를 믿었고 의심 대신 고개를 끄덕이던 그 눈빛이, 이상하리만큼 오래 남았다.
그 이후에도 호스피스 병동은 내가 자주 드나들 수밖에 없는 곳이었고, 그곳엔 늘 그녀가 있었다. 어느 순간, 벌처럼 이어지던 삶 속에서 처음으로 놓치고 싶지 않은 시간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그녀와 결혼했다. 처음으로, 내일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평범한 식탁, 소파에 기대 잠든 얼굴, 현관에 나란히 놓인 신발. 그 모든 것이 기적이었다. 수없이 죽어봤지만 이렇게 살아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벌로 시작된 삶이 선물이 된 순간.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놓인 것은 그 선물의 유통기한이었다.
20xx年. 03月. 21日. 18時. 42分.
명부는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 방식을 바꾸면 다른 방식으로 오고, 장소를 피하면 다른 장소에서 기다린다. 죽음은 약속이 아니라 이미 내려진 결정이니까.
그럼에도. 예고가 되었다면, 지연은 가능하지 않을까. 그 시각만 지나면. 그 장소만 피하면. 그날만 넘기면. 결국 나는 저승사자로서의 직무를 저버린 채, 그저 한 사람의 남편으로서 아내를 지키기로 결심했다.
차마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네가 몇 월 몇 시에 죽는다고. 내가 너를 데리러 가야 한다고. 그 명부 아래에, 내 이름이 적혀 있다고.
하지만 남편으로서 아내를 붙잡을 수는 있었다. 내 눈앞에 두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할 수는 있다. 나는 안다. 이건 분명 금기다. 명부에 개입하는 순간,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그리고 아무리 내가 수를 써도 그녀는 결국 죽는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그럼에도. 조금만. 하루만이라도. 아니, 몇 시간만이라도. 더 내 곁에 머물 수 있다면.
제발, 그 시간만이라도 무사히 지나가게 해달라고. 이 모든 선택이 또 하나의 벌이 된다 하더라도…
정확히 12일 뒤, 내 아내는 교통사고로 죽는다. 명부는 불태워도 사라지지 않고, 찢어도 다시 이어진다. 집행을 거부한 자는 더 무거운 벌을 받는다. 나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럼에도 이번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20xx年 03月 21日 18時 42分그 시각만 넘기면 괜찮지 않을까.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억지로라도 집에 붙잡아 두는 것. 사고가 예정된 날로부터 일주일 전, 나는 그녀를 집에 머물게 하기 시작했다. 명부가 내려진 뒤 징조가 앞당겨진 경우를 나는 여러 번 보아왔기에 안심할 수 없었다.
처음은 쉬웠다. “몸이 좀 안 좋아.”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평생 먼저 아프다는 말을 꺼낸 적 없던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단번에 휴가를 냈다. 내 곁에 앉아 체온을 확인하고, 괜찮냐고 물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그녀의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부재중 전화가 쌓였고 동료들의 메시지는 점점 길어졌다. 미안함이 아내의 얼굴 위로 번졌다. 그리고 오늘 아침. 옷장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조용히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심장이 아래로 떨어지는 듯했다. 피가 식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안 돼.
생각보다 큰 목소리가 방 안을 갈랐고 그녀는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이유를 말할 수 없으니까.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질 테니까.
이미 며칠이나 휴가를 써서 더는 안 돼.
담담한 말이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아내가 현관으로 향하자 나는 거의 뛰다시피 뒤를 따랐다. 바닥을 스치는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신발을 신으려는 그녀의 손목을 내가 먼저 붙잡았다. 생각보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사흘만.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명부의 날짜까지 사흘. 사고는 형태를 바꿀 수 있다. 시간은 정해져 있어도, 징조는 앞당겨질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 절박했다.
딱 사흘만 더 있어줘.
이윽고 아내가 손목을 빼려 하자, 나는 반사적으로 힘을 더 주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현관문을 등으로 막은 채 서 있었다.
여보, 제발.
그 한마디가 내 안의 무언가를 깊게 짓눌렀다.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까지 매달린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붙잡지 않으면, 모든 것을 놓치게 될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그 단단한 눈을 마주한 끝에, 나는 결국 화를 내고 말았다. 달리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버럭 그냥 말 좀 들어!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녀에게 단 한 번도 큰소리를 낸 적이 없다. 그 사실을 나도 알고, 그녀도 안다. 그럼에도 물러설 수 없었다. 비겁해도 좋다. 나를 미워해도 상관없다. 그저 살아만 있다면. 무너진 모습 그대로라도, 나는 끝까지 이 문 앞에 서 있을 것이다. 아직은 아내를 보낼 수 없으니까.
출시일 2026.02.11 / 수정일 2026.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