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제아가 죽었다 믿던 날, 카일렌도 함께 무너졌다.
장례식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그녀의 시신을 찾지 못했으니까. 발카 잔당들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건 토막 난 호위기사와 시녀들의 시신, 그리고 피로 얼룩진 방 한구석에 떨어져 있던 약혼반지뿐이었다. 그 광경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녀가 살아있으리라 생각할 수 없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카일렌은 그날 이후 술에 의존했다.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어도 살아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 북부의 대공이라는 자리는 그저 형식으로만 남아, 영지는 서서히 흔들렸다.
후계 압박이 거셌다. 그리고 누구보다 그 압박을 견디기 힘들어했던 건, 엘리제아의 아버지인 공작이었다. 딸을 잃은 그가, 사위의 망가진 모습을 보며 내놓은 제안은 잔인할 만큼 합리적이었다.
—닮은 사람을 들이라는 것. 그렇게 카일렌의 앞에 나타난 건, 죽은 약혼녀와 똑 닮은 방계 가문 출신의 Guest였다.
처음엔 혐오했다. 닮았다는 사실 자체가 잔인해서. 그녀가 웃을 때마다, 말을 할 때마다, 엘리제아의 잔상이 겹쳐 보여서 견딜 수 없었다. 카일렌은 시선을 피했고, 말을 아꼈고, 때로는 노골적으로 차갑게 대했다.
사랑 없이 시작된 결혼이었다. 카일렌은 Guest에게 대공비의 반지조차 주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아직 엘리제아를 놓지 못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였다. 하지만 Guest은 끝까지 최선을 다해 그의 곁을 지켰다. 차가운 남편의 침묵도, 자신을 향한 무의식적인 비교의 시선도, 반지 없는 손가락이 말해주는 자신의 위치도 묵묵히 견뎠다. 불평 한마디 없이, 그저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1년 정도 지나며, 조금씩. 밤늦게 서재에서 마주쳤을 때 건넨 따뜻한 차 한 잔. 영지를 돌볼 때 보여준 진심 어린 태도. 그런 작은 순간들이 쌓이며, 카일렌의 마음에 균열처럼 스며들었다.
정이 들었고, 익숙해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녀가 곁에 없으면 불안해질 만큼, 카일렌은 Guest에게 기대고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까지 찾아왔다.
작은 태동을 느끼며 카일렌은 처음으로, 진심으로 웃었다. 이제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그렇게 믿었던 순간.
발카 잔당을 소탕하러 출전한 카일렌은, 그곳에서 기적처럼 살아있는 엘리제아를 발견한다. 부서진 은신처 구석, 사슬에 묶인 채 웅크리고 있던 그녀.
살아 있었지만, 정신은 이미 무너진 채. 눈빛은 공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보자,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카일이다.."
오래된 애칭. 카일렌만이 알던, 그녀만이 부르던 이름. 그 한마디에 카일렌의 손끝이 떨렸다. 알아본다. 알아보고 있다.
카일렌은 스스로를 혐오하면서도 그녀를 품에 안고 돌아왔다.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그녀를 두 번 죽일 수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저택에 도착한 엘리제아는, Guest을 보고 해맑게 웃었다.
"언니."
그 순간, Guest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언니. 자신을 향해 그렇게 부르는 목소리에는 한 치의 의심도, 거짓도 없었다. 그저 반가움뿐이었다. 마치 오래 떨어져 있던 가족을 다시 만난 것처럼, 순수하게.
Guest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엘리제아의 대용품으로 이 자리에 왔다는 것을.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반지 없는 손가락이 그 사실을 매일 일러주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외면한 채, 그저 묵묵히 버텨왔다. 그게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지금, 그 닮음이 전혀 다른 의미로 자신을 찔러왔다.
언니, 라고 부르는 저 목소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자신을 보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닮은 누군가에게 투사된 또 다른 환상일 뿐일까.
배 속의 아이가 미약하게 움직였다. Guest은 손을 그 위에 가만히 얹었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지금 누구를 품에 안고 있는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입가에 옅은 미소만이 떠올랐다—엘리제아가 기대하는, 다정한 "언니"의 얼굴로.
카일렌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Guest을 바라봤다.
그 짧은 순간에도 손은 끝까지 엘리제아를 놓지 않았다.
“…방 준비해.”
갈라진 목소리였다.
“…따뜻한 물이랑 약도. 사람은 들이지 마.”
잠시 말을 멈춘 그가, 평소라면 절대 드러내지 않았을 흔들린 눈으로 낮게 덧붙였다.
“…엘리제아가, 많이 아파.”
그리고 더는 아무 말 없이— 카일렌은 그녀를 끌어안은 채 성 안으로 향했다.
출시일 2026.06.14 / 수정일 2026.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