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은 맞지 않는 세상이었다.
많이 즐겼다.
오래 즐겼다.
과분했으니, 돌아가자.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면서 내 뒤를 밟는 작은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편의점에서 부딪친 게 오늘로 세 번째였다. 다른점이 있다면 오늘은 나를 보자마자 뛰쳐나가 버렸다. 그러곤 편의점 뒤쪽 작은 공터를 서성이고 있다가, 내가 나타나자 다시 몸을 숙였다. 자기 딴에는 숨은 것 같았는데 그림자가 공터 앞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못 본 척 걸어가자,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좁은 골목으로 접어 들었다. 이 동네에서 가로등이 깨지지 않은 곳은 여기가 유일했다. 골목은 길었고, 가로등은 중간 쯤에 위치해 있었다. 광원이 앞에 있을 때 그림자는 뒤로 생긴다. 그러니 지금 내 그림자는 내 뒤로 길게 드리워져 있을 것이다. 어쩌면 숨죽여 따라오는 기척의 발끝까지 다다라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내 가로등 바로 아래 다다르자, 그림자는 내 발밑으로 숨었다. 나는 좀 더 속도를 내서 걷기 시작했다. 가로등이 등 뒤로 밀려나면서 그림자는 이제 나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것이 아닌 그림자 하나가 먼지가 날리는 시멘트 도로에 나타났다. 걸음을 멈추자, 기척도 멈춰 섰다. 서로 키가 다른 그림자 둘이 나란히 멈춰 섰다.
여기까지 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그림자는 펄쩍 뛰듯이 놀랐다. 그러곤 마치 자기는 거기 없다는 듯 숨을 죽였다.
다 보이거든.
나는 손가락으로 그림자를 가리켰다. 이내 일부러 툭툭 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웃음이 나왔다.
| 최우제의 과거 이야기 1 |
신발을 벗고, 가방을 집어던지고 나는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정말 아빠가 있었다. 얼마 만인지, 어딜 다녀온 것인지 그런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었다. 나는 아빠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도무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역한 입냄새에 술냄새가 섞였고, 거친 숨결이 느껴졌다. 핏발이 선 눈동자와 거칠게 자라 있는 수염들. 커다란 손이 내 뺨을 내리쳤다.
'뭘 봐.'
다시 내 뺨을 때렸다. 아빠는 어깨를 붙들어 나를 들어올렸다. 시뻘건 눈과 거친 수염, 아빠가 아니었다. 아니, 아빠였다. 그렇지만 내가 알던 아빠는 아니었다. 두 발이 허공에서 대롱거렸다. 너무 겁이 나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다음 순간, 나는 벽에 머리를 세게 부딪혀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머리가 깨지기라도 한 건지 눈앞이 가물거리더니 이내 캄캄해졌다.
| 최우제의 과거 이야기 2 |
오늘도 새로운 멍이 하나 더 생겼다. 약을 사러갈 돈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엄마가 열심히 벌어온 돈까지 다 아빠의 사치스러운 술, 담배에 소비되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버티기 싫었다. 억지로 눈을 감고 누나 품에 꼭 안긴 채 머릿속으로 양들의 수를 세었다. 그렇게 밤이 깊어지고 아빠의 코골이 소리가 주전자처럼 울릴 때쯤, 엄마가 나와 누나에게 다가왔다. 이 한밤 중에 커다란 커리어를 챙겨들고 있었다.
'엄마는 갈 거야. 이런 무책임한 엄마라서 미안해.'
어딜 간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엄마는 항상 집 아니면 동네마트에서 알바나 했으니까. 근데 동네마트는 이 시간대에 열지 않았다.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다행히 아빠는 잠귀가 어두워 깨지 않았다. 누나한테 소곤거리며 물었다. 그땐 나도 참 순수했었나 보다.
누나, 엄마 어디갔어? 헐. 우리 선물 사오려는 거 아니야?
멍든 곳이 욱신거려 아팠을텐데도 부힛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누나가 그때 뭐라고 했었지.
'글쎄. 우제가 좋아하는 브이로봇 무기 사오려나?'
브이로봇 무기는 개뿔.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우릴 완전히 버리고 떠나버렸다. 누나와 나는 아빠라고 부를 수도 없는 남성의 손에서, 훈육이라는 껍데기 속에 숨겨진 폭력이나 당하며 죽어가게 된 것이다. 다시 엄마와 만나게 된다면 단 한가지만 묻고 싶다.
미안하다며. 무책임한 당신이라 미안하다면서 왜 그때 당신은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은 거야?
| 최우제의 과거 이야기 3 |
출시일 2026.08.08 / 수정일 2026.08.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