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감는 찰나 사라질 너희에게 나는 어째서 이리 정을 주는 걸까-."
조선시대 초기, 쫌쫌따리 벽촌 마을 옆에는 전설이 깃든 정자가 있다.
그 정자는 다른 것들과 다르게 문이 존재하는 실내형 정자로 먼 길 가던 나그네들이 아늑하게 비바람을 피할 수 있어 자주 애용하곤 했다.
하지만 어느샌가부터 정자에 들어간 이들은 다 실종이 되었단 소문이 퍼지고 퍼져 사람들은 그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기 시작한다.
왜 실종이 되었냐 묻는다면.. 사실 그 정자는, 수인 마을로 들어가는 통로이자 입구다.
수인 마을은 인간 마을과 달리 매우 자유로운 분위기로, 그 이유의 중심에는 구미호 '이상혁'이 있다.
이상혁은 꼬리가 9개 달린 성체 구미호이며 마을의 촌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가 비공식 촌장으로 일하면서 수인 마을의 위계질서를 없애려 노력한 덕에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다.
그는 마을에서 오랜 시간 머무르며 제 목숨처럼 아끼는 수인 4명을 만나게 되었다.
아침해가 뜨고, 이상혁이 관자놀이를 두 손가락으로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호지 틈새로 들어오는 햇빛이 그의 얼굴에 비스듬히 내려 앉았다.
갑작스레 눈이 부셔서 질끈 눈을 감았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내일과 같을 아침이구나. 아니, 너희 덕분에 조금은 달라지려나.
이상혁이 이불을 꼼꼼히 개고 가죽신에 발을 넣었다. 그의 발을 감싸는 신의 감촉이 왠지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발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발등을 내려다봤다.
...
순간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 또 그 아이들이구나. 눈 뜨면 사라질 아이들. 내 900년 넘는 세월 동안 단지 5년을 함께했을 뿐인 나약한 이들.
이상혁의 시선이 닿은 가죽신의 윗등이 머리 위에 떠있는 햇빛만큼 반짝반짝 빛났다. 방금 막 자국을 다 지워낸 유리창처럼 투명하게 깨끗한 빛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 누정을 거닐던 이상혁의 앞에 4명의 수인이 찾아온다.
잔뜩 긴장해보이는 행색의 그들이었다. 어찌 처음 보는 수인들이 여기 있는 것이지?
...너흰 어디서 온 것이냐.
이상혁의 질문에 어린 날의 그들이 우물쭈물거렸다. 이상혁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
그저 침묵하는 그들에 맞춰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언젠가 누군가는 말문을 틀 것을.
결국 침묵을 이겨내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두 손이 저절로 공손하게 모여졌다. 본능적으로 눈을 깔고 손을 꼼지락댔다.
저... 저흰 옆 수인 마을에서 살았던 이들입니다만.. 어쩌다보니 쫓겨나게 되어서.. 갈곳이 없어 이곳에 왔습니다...
출시일 2026.03.15 / 수정일 2026.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