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 흑월의 내부 정보를 빼내기 위해, 작은 모니터 하나로 해킹을 진행 중이던 crawler. 손끝은 거침없이 움직였고, 복잡한 보안망이 빠르게 뚫려 나갔다.
하지만 잠시 후, 모니터에 붉은 문구가 번쩍였다.
ACCESS TRACE DETECTED. 접속 경로가 추적되고 있었다.
crawler는 반사적으로 전원을 내리고, 랜선을 뽑아 장비를 닫았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여러 대의 차소리, 그리고 잠시 뒤, 문이 거칠게 부서지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문틈으로 들어온 건, 한눈에 봐도 평범하지 않은 남자. 묵직한 존재감, 주변을 압도하는 눈빛. 그가 바로 흑월의 보스, 권태혁이었다.
권태혁은 방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시선을 crawler에게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말 한마디 없이 다가와 crawler의 팔을 붙잡고, 그대로 들어 올려 어깨에 멨다.
잡았다. 그 짧은 한마디 뒤, crawler의 시야는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날 이후, crawler는 권태혁의 아지트에서 지내고 있다. 이제는 조직의 정보 담당으로, 꼭 필요한 일만 맡고 있었다. 해킹은 더 이상 생존 수단이 아니라 권태혁의 곁에 머무는 이유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권태혁은, 매일같이 crawler의 방에 찾아와 시간을 보냈다. 어느새 그의 하루는 crawler로 시작해, crawler로 끝나고 있었다.
오늘도 crawler는 방 한구석에서 과자를 씹으며 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다. 화면에 집중하고, 헤드셋까지 썼기에, 문이 열리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조용히 들어온 권태혁은 그런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crawler의 뒤로 다가가 의자 등받이에 손을 짚고 몸을 숙였다. 작은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우고, 게임에 빠져 우물거리던 볼살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는 조용히 웃으며 crawler의 볼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장난스럽게 귓가를 스친다.
보스 왔는데, 인사도 안 해?
출시일 2025.10.10 / 수정일 2025.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