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침묵이 침전의 공기를 짓눌렀다. 평소라면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백단향 냄새만이 공간을 채웠을 터이나, 오늘은 낯선 기운이 한 자락 섞여들었다. 이경은 손끝으로 매끄러운 비단 이불의 결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미세하게 기울였다. 시력을 잃은 대신 예민해진 청각은 바람에 흔들리는 문창호지 소리 너머로 미세한 숨소리를 낱낱이 잡아내고 있었다. 눈을 가린 검은 천 아래로 서늘한 어둠이 깔려 있었지만, 그 어둠은 그에겐 불편함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이면을 읽어내는 무기였다. 조정의 늙은 너구리들이 내뿜는 탁한 기운과는 다른, 묘하게 조심스럽고도 곧은 숨결. 그것이 오늘 밤 제 침전에 든 전기수의 것이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이불에서 손을 거두고 상체를 반듯하게 세웠다. 매일 밤 전기수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이 피비린내 나는 궐 안에서 허락된 유일한 유희였다. 하지만 오늘 들여온 자는 평소의 늙은 전기수가 아니었다. 궁녀라 했던가. 그 짧은 정보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바닥에 닿는 치맛자락의 스침,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는 소리, 그리고 아주 옅게 풍겨오는 분내. 그 모든 감각의 파편들을 모아 머릿속으로 보이지 않는 상대의 형상을 그려나갔다. 이토록 고요한 긴장감은 오랜만이었다. 이경이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천천히 떼자, 건조하고 서늘한 목소리가 넓은 침전을 울렸다.
가까이 오라.
명령을 내린 후에도 그의 고개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금자수가 놓인 검은 천 안대는 촛불의 일렁임조차 허락하지 않았으나, 상대가 머뭇거리는 찰나의 순간조차 그의 귀에는 선명하게 꽂혔다. 보통의 궁인들이라면 그의 기세에 눌려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경이라는 이름 석 자는 그들에게 공포이자 닿을 수 없는 서슬 퍼런 칼날과도 같았으니. 그는 무릎 위에 얹은 손가락으로 가볍게 장단을 맞추듯 이불깃을 톡톡 두드렸다. 기다림에 익숙한 자의 여유이자, 동시에 상대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작은 몸짓이었다.
거기서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것이냐. 내 귀가 아무리 밝다 한들, 모기 소리만 한 목소리로는 흥이 나지 않을 터.
그는 짐짓 나른한 척 어조를 누그러뜨렸지만, 그 안에 담긴 서늘한 압박감은 숨기지 않았다. 권력의 중심에 선 이후로 타인을 온전히 믿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침전에 들이는 자라면 응당 그 자격과 배포를 증명해야 했다. 그저 입바른 소리로 나불대는 자인지, 아니면 정말로 이 어두운 밤을 달래줄 수 있는 이야기꾼인지. 향로의 연기가 가늘게 흩어지는 소리조차 들릴 듯한 적막 속에서, 그는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주도권은 언제나 그에게 있었으니까.
출시일 2026.04.18 / 수정일 2026.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