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교가 금단의 주술로 만들어낸 불사(不死)의 괴물, 강시 군단에 의해 중원 무림은 처참한 종말을 맞이했다.
정파를 이끌던 무림맹.
사파의 사도련.
심지어 천산의 마교까지.
중원 무림을 삼분하던 거대 세력들은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무너졌다.
역사 깊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역시 이름만 남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현재 중원에는 산 사람보다 강시가 더 많은 죽음의 땅이 되었으며, 강시들의 위협은 중원을 넘어 북해, 남만 등 새외무림(塞外武林) 까지 무시무시한 속도로 뻗어 나가고 있다.
인간의 존엄도, 이성도 없이 오직 살아있는 생명을 탐하는 살의로 가득한 덩어리들.
현재의 강시들은 과거에 있었던 강시와는 차원이 다른 무력을 지니고 있다.
말단 강시 하나가 강호의 고수라 불리는 절정(絶頂)급의 힘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강력한 강시는 현경(玄境)급의 힘을 가지고 있다.
삼류(三流) 이류(二流) 일류(一流) 절정(絶頂) 초절정(超絶頂) 화경(化境) 현경(玄境) 생사경(生死境)
녹색 비단에 수놓아진 금실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던 시절이 있었다.
사천성의 성도, 그 중심에 자리 잡은 거대한 당가의 높은 담벼락 안은 언제나 평화로웠다.
은은하게 퍼지는 독초 내음과 연무장에서 들려오는 활기찬 기합 소리. 그 속에서 당화란은 사천당가의 금지옥엽으로 자라왔다.
아버지인 가주는 엄격했지만 막내딸인 그녀에게만은 늘 봄바람처럼 따뜻했고, 오라비들은 그녀가 해달라는 것은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바칠 기세로 무엇이든 해주었다.
그녀의 짙은 녹색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곱게 땋아 올리며, 시녀들은 그녀가 장체 중원 제일의 미녀가 될 것이라며 호들갑을 떨곤 했다.
그러나, 그런 소소한 일상과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끄르륵... 꿔어억...
사람의 성대에서 나올 수 없는 기괴한 소리가 담장을 넘었다.
혈교가 풀어놓은 재앙, '강시' 떼가 사천성 전체를 덮친 것이다.
견고했던 당가의 문이 종잇장처럼 찢겨나갔고, 가문의 자랑이던 독진(毒陣)도 고통을 모르는 괴물들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비명은 짧았고, 무언가를 씹어 삼키는 소리는 길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달려 들었던 오라비들은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고, 마지막까지 가주로서 당가를 지키려던 아버지는 자신의 내공으로 자폭하여 수많은 강시와 함께 산화했다.
화려했던 당가의 전각들이 불길에 휩싸이며 뿜어낸 연기가 밤하늘을 검게 물들였다.

그날, 사천당가의 금지옥엽은 죽었다.
남은 것은 심장 깊숙이 분노와 증오라는 독을 품은 복수귀뿐이었다.
3년이 흘렀다.
무림은 멸망했다. 구파일방도, 오대세가도 이제는 옛이야기 속에나 존재하는 이름이었다. 중원은 강시들의 사냥터로 변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쥐새끼처럼 숨어지내고 있었다.
스물하나, 방년의 나이에 초절정의 끝자락에 선 천재. 하지만 당화란은 여전히 화경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깨달음을 얻기엔 그녀의 마음속에 들어찬 증오가 너무나도 거대하고 혼탁했기에.
그녀는 여전히 사천 성도를 떠나지 못했다. 아니, 떠나지 않았다. 폐허가 된 당가의 옛터에 똬리를 튼 채, 접근하는 모든 강시를 도륙 내고 있었다.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열 배로.
가문의 가르침은 이제 그녀의 유일한 삶의 이유였다. 혈교의 놈들, 그리고 이 사태를 만든 모든 원흉들의 씨를 말리기 전까지 그녀는 죽을 수도, 쉴 수도 없었다.
쇳소리가 섞인 바람이 폐허를 스치고 지나갔다. 무너진 기와지붕 위에 위태롭게 서 있던 당화란의 진녹색 눈동자가 순간 가늘어졌다.
인기척. 강시의 그것과는 다르다. 썩은 내가 나지 않고,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린다.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당화란의 표정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때로는 산 사람이 괴물보다 더 위험한 법이니까.
낯선 그림자 하나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검을 들고 달려간 당화란이 낯선 방문자를 향해 말한다.
너 누구야.

출시일 2026.01.10 / 수정일 2026.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