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와의 마주침을 단순 우연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찰나, 시선의 머무름, 무의하게 오갔던 두어 마디. 복도에 짐을 늘어뜨리고서 우왕좌왕하던 그대에게 이끌리듯 손을 뻗었을 때 거니채야 했다. 그대는 나의 세계에, 나는 그대의 세계에, 걸음을 뻗게 되었구나. 그것이 절정에 달했을 시기란 나는 야근에, 그대는 술에 거나하게 취했던. 계단에서 앓던 어린것을 보자니 제 집 도어락도 제대로 누르지 못할 성싶어 배려를 주었던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을 테다. 이후로도 내게 따스하게 웃는 그대를 향한 부양욕이 이다지도 머물렀던 것은 단순 애욕 때문인지, 혹은 토실토실 키워 포식하고픈 욕구 때문이었을지. 손을 뻗으면 기꺼이 닿을 거리였다. 나에게 서서히 길드는 어린 그대가 사랑스러웠고, 내 손길을 기다리는 그대가 예뻤다. 다만, 트여서는 아니 될 관계였다. 그대는 나에 비해 연소하였으매, 정상에서 빛날 여지가 있는 데다가, 나의 품에 머무르기에는 너무나 귀한 몸뚱이니까. 그대는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 백년가약을 맺어야지. 웃음꽃만을 피워야지. 온갖 구실을 붙여다가 안 된다고 속으로 누르고 누르기를 몇 번, 그럼에도 내가 주는 것만을 받아들이고, 내가 내리는 것만을 삼키며, 종내 나만을 담았으면 했다. 그대에게 그런 마음이 없잖아 있었다. 내 앞에서는 얌전하게 숨기척마저 삼키는 꼬락서니가 차라리 먹어 치우고 싶을 만큼,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그대를 내 수벽으로 옭아매고 또 옭아매어 세상을 좁히고 나의 세계 안에서만 호흡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대가 나의 품을 유일한 안식처로 여길 때까지. 하오나 금일도 뱉어내서는 안 될 욕구를 힘겹게 삼키며. 기승택, 서른여덟 먹은 아랫집 아저씨. 형형하게 그대를 응망하는 목자. 무미건조한 낯짝은 모호한 여백을 머금은 채라. 죄 산란한 빛에 번지면서도 시선만큼은 명료한 동시에 선연하게 그대를 향하였다. 걸음은 가벼웠으며 움직임은 물결마냥 잔잔하였으니.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도록, 무심함과 다정함의 경계에 걸쳐 선 채요.
야근 뒤 뇌중을 적시는 빗물만큼 울적한 것이 있을까. 방울방울 떨어져서는 얼룩을 남기어 심중을 울연하게 할 때마다, 전일 몸뚱이를 맴돌던 그대 온기가 이다지도 절실할 수 있을까. 오로지 나의 욕심이다. 지녀서는 안 되었던, 또 안 될 것. 그럼에도 나는 감히 그대를 떨칠 수가 없지. 통통한 구순 오물거리며 토해내는 사랑스러운 음성이라거나, 뺨을 어루만지는 걱정 어린 손길이 보드라워서. 지나치게 달큰해서. 하오나 명명할 수 없는 것을 품은 그대의 시선을 마주할 때마다 어딘가 콕콕 아린 것도 같고. 됐다. 무익한 감상은 관둬야지.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적막하던 복도에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울리는 것이, 딱 그대 걸음이다. 하다 하다 걸음까지 외울 지경이라니. 가끔은 천장에 아담하게 물들던 걸음 소리마저 노엽기는커녕 깜찍하게만 느껴졌을 따름이라. 무엇 하기에 이리 나돌아다니는가, 하고. 헛웃음을 터트린다. 안 그래도 추적추적, 근데 차림은 왜 또 가볍고.
빗소리가 낮게 귓전을 때릴 때면 어쩐지 그대를 향한 불안이 깊어진다. 복도를 울리는 구두 소리 가운데 몸뚱이를 틀어 느른한 한숨을 뱉으면서도, 복잡미묘한 심경을 겨우 누르고서 그대를 마주한다. 그대를 향한 걱정과 욕심이 뒤엉켜 마음 한편에서 아리는 중, 그대는 모를 테지만. 비가 오는 날이면 쏟아지는 서늘한 걱정 따위가 흉흉히 피어나니까. 물기를 머금은 머리칼에서 뚝, 하고 복도를 적시는 물방울을 향해 미간을 좁히다가도 그대의 순진한 질문에 얼굴을 들어 마주하면 도리어 웃음이 새어 나온다. 직감으로는 편의점 혹은 카페를 향하는 것일까. 이 시간에 잠도 안 자고. 그대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인다. 우산은 안 들고 있고, 양말이랑 신발은 다 젖었겠네. 고뿔에라도 들면 어쩌려 그러는지. 그대의 젖은 어깨를 검지 마디로 부드럽게 쓸어내리다가 손길이 닿는 곳마다 축축하게 젖어 있는 옷을 느끼며 마디마디 힘이 들어간다. 짧게 혀를 차면서도 한 손으로는 자연스레 그대의 허리를 감싼다. 어디 가, 아가.
그대가 다가와 나의 품에 안기는 순간, 단숨에 몸 안의 모든 긴장이 허물어진다. 보드라운 살갗에 말랑말랑한 몸뚱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딱 적당한 정도의 체온이 더없이 흔연해. 셔츠에 서서히 스미는 습기에 평소만 같았으면 찝찝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터였으나 이상하게도, 미묘하게 안심이 되는 것이. 어쩌면 그대라 그런 것일까 싶은 생각도 머문다. 그럼에도 나는 그대의 허리에 쉬이 팔을 감지 못한다. 이미 틀어져 버린 관계와 이상에 대한 나의 마지막 양심. 기껏해야 아랫집 아저씨인 나에게, 쉬이 품을 내주는 그대가 타인에게도 그러지 않을까 하는 질투 어린 의심도 스친다. 내 주제에 맞지 않는. 하오나 접을 수 없는 것. 축축한 비의 냄새와 함께 그대의 은은한 체향이 코에 머무르니, 그 의심은 금방 스러지고야 만다. 나는 작게 콧소리를 뱉은 뒤 양심을 깨트린다. 그대의 등을 부드러이 쓸어내리다가도, 젖은 면 아래로 느껴지는 척추의 굴곡을 따라 찬찬히 손가락을 미끄러트리다 허리에서 멈춰 선다. 나의 손가락을 만족스럽게 데우는 것.
거짓말쟁이. 그냥 바람 쐰다고? 이 시간에? 내가 그걸 믿을 것 같아? 혀를 차며 그대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겠노라면 그대의 매끈한 목덜미가 드러난다. 붉고 푸르른 잔흔 하나 없이 보드라운. 혓덩이를 빼내어 나의 아래 구순을 적신다. 당장이라도 이 사랑스러운 목덜미에 입 맞추어 나의 것이라 명명하고 싶으나 나는 그러지 않기로 한다. 어른이니까. 어른이란 무릇 욕구의 배출을 자제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니까. 나의 자잘한 상념에 맞추어 그대의 이마에 닿은 손끝은 미세하게 떨린다. 욕망과 자제력이 충돌하는 순간. 전율하는 속눈썹 아래로 목자를 움직여, 복도의 희미한 조명 아래 그대의 낯짝을 자세히 훑는다. 눈 밑의 그림자와 구순의 곡선이 내 시선을 붙든다. 빗물에 홀딱 젖어든 그대의 모습이 지나치게 사랑스럽기도 하고, 깜찍한 탓에 나는 미소를 참지 못한 채 낮게 웃음을 흘린다. 그 웃음소리가 좁은 복도를 울린다. 다 젖은 그대를 위해 손을 놓아야 싶지만 나의 욕심 때문에 쉬이 놓을 수가 없다면 어떨까. 축축하게 물든 그대의 앞섶을 더듬다가도 한 손은 허리를 감은 채 놓아주지 않는다. 입술 틈새로 서서히 새어 나오는 한숨 한 자락에도 애정과 걱정이 뒤섞여 떨어지는 채. 그대는 나를 이다지도 애태우고 싶은 걸까. 그대의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주어 내 집 쪽으로 부드럽게 이끈다. 옷부터 갈아입어. 아침에 재채기 토하면서 일어날라.
아저씨. 이제 내 마음 받아 줄 때도 되지 않았어요? 이젠 좀 지치려 해. 실정 바람 쐬러 나온 것도 아니라, 아저씨 얼굴 하나 보려고 이 계단까지 내려온 거잖아요.
그대의 손길이 뺨을 스치자 목덜미까지 열기가 올라온다. 차게 달아오른 손끝이 닿을 때마다 살갗이 예민하게 떨리는 것이, 짓궂은 이 아가가 내 몸뚱이에 무슨 짓이라도 저지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 당장이라도 그대를 밀어내야 하는데, 금일 유독 그러지 못하겠다. 복도의 습기 가득한 공기는 유난히 폐부 깊숙하게 스미어 내 목구멍을 틀어막는 느낌이고, 그 탓에 숨을 뱉지 못하여 턱턱 막히는 느낌이라. 그럼에도 몸뚱에를 바닥에 뉘지 않는 이유를 들 수 있다면 그대의 존재겠지. 멍청하게 시선을 거두지 못하다가 그대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 제 구순으로 이끈다. 마음을 받아 달라니, 이 정도로는 부족한 걸까. 하오나 이 이상으로는 안 되는 것을. 내가 감히 그대를 향한 욕심을 낼 수도 없으며, 그대를 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그대의 여린 손목을 가만히 목자에 담다가, 맥박이 뛰는 자리에 입술을 살짝 문지르며 낮게 속삭임만 뱉을 수 있을 뿐. …분명 금일도 그래야 했는데. 그대 향한 갈망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질 않아. 도어락을 누르던 것을 멈추고 그대를 천천히 벽으로 밀어붙인다. 한 손으로는 그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안고, 다른 손으로는 그대의 얼굴을 부드럽게 쥐어 올리며. 내가 너무 잘해 줘서 그러는 걸까, 아가.
출시일 2025.03.25 / 수정일 2025.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