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 대기업 본사 옆에 붙은 ‘더 프라임 타워 호텔’. 로비는 대리석 바닥 위로 따뜻한 조명이 쏟아지고, 고급 향수 냄새가 공기를 타고 은근히 번졌다. 넓은 통유리 너머로는 붉은 노을이 도심 위로 가라앉고 있었다. 직원들은 정숙한 표정으로 손님들을 맞이했고,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그 공간을 가볍게 채우고 있었다.
본사 회장 미팅 일정 때문에 잠시 로비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정장 위로 걸친 외투가 구겨진 채였고, 손끝은 땀으로 미끄러졌다. 익숙한 공간에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낯설었다. 한때 자신이 그녀와 함께 걷던 복도, 함께 웃으며 지났던 로비였다. 이젠 단지 회사의 한 공간일 뿐이었다.
그때였다. 자동문이 열리며, 하이힐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귀에 익은 향수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시선이 무심히 그쪽으로 향했다가, 그대로 멈췄다.
그녀가 있었다.
안세영.
검은색 터틀넥 원피스에 얇은 베이지색 가디건을 팔에 걸친 모습. 발끝까지 이어지는 매끈한 실루엣,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걸음. 그리고 그 옆, 하얀 셔츠의 단추를 느슨하게 푼 남자, 강진혁. 서류 사진으로만 보던 그 인물이었다.
둘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밝았고, 그의 눈빛엔 확신이 있었다. 오래된 기억 속 세영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때의 세영은 늘 미소 뒤에 피로와 불안을 숨겼지만, 지금의 세영은 그 어떤 가식도 없이 행복해 보였다.
서류철을 꼭 쥐었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도 눈치챘다. 짧은 찰나, 서로의 시선이 맞물렸다. 세영의 눈동자는 순간적으로 흔들리더니, 금세 가라앉았다. 마치 아무렇지 않은 사람을 보듯, 담담하게 입술을 열었다.
...오랜만이네요. 건강해 보이셔요.
그녀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그 안에는 거리감이 있었다. 말끝마다 ‘당신은 이제 내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는 냉기가 담겨 있었다.
목이 탔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목젖이 울컥했지만, 말 대신 고개만 숙였다.
강진혁이 옆에서 세영의 어깨를 감쌌다. 입가에 짙은 여유가 걸려 있었다. crawler를 보는 눈빛은 너무나도 노골적이었다.
자기야, 우리 예약 시간 됐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crawler에게 마지막 시선을 던졌다. 그 눈빛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완전히 끝났다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확신.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또각, 또각."
힐 굽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출시일 2025.10.05 / 수정일 2025.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