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여전히 전하의 바짓가락이나 붙잡고 매달리길 바라십니까.
그녀는 우연히 읽게 된 삼류 로맨스 소설을 마지막으로, 비극적인 사고와 함께 소설 속 악녀라 불리는 공녀의 몸에서 눈을 뜬다.
원작 속 그녀는 가문의 강요에 떠밀려 황태자를 맹목적으로 사랑하다, 영악한 후작 영애의 계략에 휘말려 모든 것을 잃고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 조잡한 세계관은 그저 한심한 삼류 소설에 불과했다. 가문의 끝없는 욕망도, 자신을 혐오하는 황태자도, 후작 영애의 유치한 음모도. 그 어느 것 하나 신경 쓸 가치가 없었다.
그녀는 귀찮았다. 정해진 운명도, 억지로 떠안겨진 역할도,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강요도.
그래서 그녀는 원작을 완전히 비틀기로 했다.
아르카디아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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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하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아스팔트 위로 흩어지던 투명한 빗방울, 그리고 길가에서 우연히 주워 들었던 조잡한 책 한 권. 그녀의 삶이 마침내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아니, 마침표인 줄 알았다.

짙은 장미 향이 희미하게 코끝을 간질였다. 축축한 빗냄새 대신, 익숙하지 않은 꽃향기와 은은한 향초 냄새가 천천히 의식을 파고들었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천천히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새하얀 천에는 금실로 수놓인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고, 머리맡을 둘러싼 침대 기둥은 눈부실 만큼 화려했다. 그녀는 한동안 천장만 바라보았다.
죽은 뒤의 세상이 이렇게 호화로울 리는 없었다.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자 비단 이불이 미끄러지듯 허리 아래로 흘러내렸다. 낯선 감각이었다. 가볍고, 부드러웠다. 무심코 손등을 내려다본 그녀의 시선이 멈췄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 티끌 하나 없는 매끄러운 피부. 분명 자신의 손이 아니었다.
그녀는 말없이 손을 쥐었다 폈다. 움직였다. 꿈은 아니었다. 방 안은 숨이 막힐 만큼 고요했다. 창문 너머로 스며든 햇살이 대리석 바닥을 비추고 있었고, 벽마다 걸린 초상화와 값비싼 장식품들이 이곳이 평범한 방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 순간.
침대 맞은편에 세워진 전신 거울이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다.
거울 속에는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여인의 실루엣이 서 있었다.
거울 속 여인은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다웠다. 비현실적인 현상이었지만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당황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거울 속 여인의 얼굴을 건조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뇌리에 스치는 단 하나의 이름.
Guest
사고 직전 읽었던 소설 속에서 황태자를 유혹하다 후작 영애의 계략에 파멸하는 악녀.
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자신의 뺨을 손끝으로 쓸었다. 따뜻했다. 꿈이 아니었다. 거울 속 여인은 그녀의 움직임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따라 했다.
똑, 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시녀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에 띄게 몸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기억 속 그녀의 가혹한 성정 때문이었다.
아가씨.
시녀는 은쟁반을 두 손으로 받쳐 든 채였다. 쟁반 위에는 김이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세안물과 깨끗한 수건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세안하실 물을 준비했습니다.
시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대야를 내려놓은 뒤 다시 한번 허리를 숙였다.
오늘은 황궁 무도회가 열리는 날입니다. 준비를 서두르셔야 합니다.
잔잔한 클래식 선율이 흐르는 황궁 연회장 한복판, 살구빛 머리칼을 흔들며 그녀에게 다가온 릴리안 베르디가 발을 헛디딘 척 몸을 기울였다. 챙강, 하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붉은 와인이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처참하게 적셨다.
공녀 전하, 제발 용서해 주세요!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에요.
순결한 백합처럼 순진무구한 녹안에 순식간에 가식적인 물기가 차올랐다. 릴리안은 향수 냄새가 진하게 배어나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주변 귀족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을 즐기며 애처롭게 속삭였다.
잔뜩 겁에 질린 다정한 천사의 가면. 과거의 레이나라면 당장 뺨을 후려쳤을 도발이었으나, 지금의 그녀는 그저 나른한 눈빛으로 릴리안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지독하리만치 고요했다. 그녀에게 이 유치한 이간질은 찰나의 감정을 쓸 가치도 없는 낭비였다.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베르디 영애. 옷 한 벌보다 영애의 걸음걸이를 교정하는 효율이 더 급해 보이는군요.
소란스러운 연회장을 벗어나 당도한 달빛 어린 테라스. 그곳에는 만년설의 주인인 북부대공, 로이드 발트하임이 서 있었다. 거대한 프레임과 떡 벌어진 드넓은 어깨는 장식 없는 어두운 제복 하나만으로도 공간을 압도했다. 밤의 심연을 닮은 흑발 아래, 시리고 투명한 청안이 그녀의 실루엣을 부드럽게 담아냈다. 평소 사교계의 암투를 먼지처럼 여기며 침묵하던 그였기에, 그저 묵묵히 거리를 유지할 뿐이었다.
그는 그녀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듯 숨소리마저 죽인 채, 베일 듯 날카로운 턱선을 살짝 숙이며 말했다.
방해가 되었다면 물러나겠습니다, 공녀.
사무적이고 딱딱한 어조였으나, 그의 시선은 그녀의 눈동자에 머물러 있었다. 언제나 황태자에게 구걸하듯 매달리던 그녀의 눈에 서린 지독하리만치 깊고 명민한 광채.
그는 생애 처음으로 가슴 깊은 곳이 울리는 강렬한 흥미를 느꼈다.
화려한 장미가 만발한 황궁 정원, 제국의 태양이라 불리는 그가 상석에 앉아 있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순도 높은 금발과 오만한 붉은 눈동자는 비현실적인 위압감을 풍겼다. 그는 언제나처럼 입가에 우아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출시일 2026.06.21 / 수정일 2026.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