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대한 부와 완벽한 재능, 대한민국 대기업의 후계자로 태어나 완벽한 체스판 같은 삶을 살던 그녀는 우연히 주운 삼류 로맨스 소설을 읽다 비극적인 교통사고를 당했다. 소설 속 희대의 악녀 레이나 발렌타인의 몸에서 눈을 뜬 그녀는 가문의 강요로 황태자를 유혹하다, 영악한 후작 영애의 계략에 빠져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예정된 결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 조잡한 세계관은 그저 따분하고 귀찮은 놀이터일 뿐이었다.
가문의 탐욕도, 황태자의 멸시도, 후작 영애의 유치한 이간질도 모두 무가치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그녀를 돌보다 못하게 보던 오만한 황태자도, 모든 것을 방관하던 북부대공도 점차 낯선 궤도로 끌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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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카디아 대륙
북부,서부,동부,남부
쾅 하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아스팔트 위로 흩어지던 투명한 빗방울, 그리고 길가에서 우연히 주워 들었던 조잡한 책 한 권. 평생을 철저한 계산 속에서 살아온 그녀의 삶이 마침내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아니, 마침표인 줄 알았다.

정적 속에서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지독한 두통이 뇌리를 묵직하게 스쳤지만, 그녀의 이성은 언제나처럼 차갑고 신속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피비린내 대신 코를 찌르는 것은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라벤더 향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사방을 둘러싼 화려한 금박 장식과 거대한 캐노피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병실도, 현대의 공간도 아니다.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전신을 비추는 거대한 전신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거울 속에는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여인의 실루엣이 서 있었다. 거울 속 여인은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다웠다. 비현실적인 현상이었지만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당황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턱을 살짝 괸 채, 거울 속 여인의 얼굴을 건조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뇌리에 스치는 단 하나의 이름. 레이나 발렌타인. 사고 직전 읽었던 소설 속에서 황태자를 유혹하다 후작 영애의 계략에 파멸하는 발렌타인 대공가의 희대의 악녀.
상황 파악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며 시녀복을 입은 아이가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왔다. 시녀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에 띄게 몸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기억 속 그녀의 가혹한 성정 때문이었다.
공녀님, 이제 준비하실 시간입니다. 세안 물을 올릴까요?
그녀는 거울을 보며 무심하게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사방을 압도하는 서늘한 기품이 방 안의 공기를 차갑게 얼려버리고 있었다.
···준비?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높낮이 없는 건조한 음성으로 물었다. 불필요한 사담은 배제한 철저히 공적인 태도였다.
잔잔한 클래식 선율이 흐르는 황궁 연회장 한복판, 살구빛 머리칼을 흔들며 그녀에게 다가온 릴리안 베르디가 발을 헛디딘 척 몸을 기울였다. 챙강, 하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붉은 와인이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처참하게 적셨다.
공녀 전하, 제발 용서해 주세요!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에요.
순결한 백합처럼 순진무구한 녹안에 순식간에 가식적인 물기가 차올랐다. 릴리안은 향수 냄새가 진하게 배어나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주변 귀족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을 즐기며 애처롭게 속삭였다.
잔뜩 겁에 질린 다정한 천사의 가면. 과거의 레이나라면 당장 뺨을 후려쳤을 도발이었으나, 지금의 그녀는 그저 나른한 눈빛으로 릴리안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지독하리만치 고요했다. 그녀에게 이 유치한 이간질은 찰나의 감정을 쓸 가치도 없는 낭비였다.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베르디 영애. 옷 한 벌보다 영애의 걸음걸이를 교정하는 효율이 더 급해 보이는군요.
소란스러운 연회장을 벗어나 당도한 달빛 어린 테라스. 그곳에는 만년설의 주인인 북부대공, 로이드 발트하임이 서 있었다. 거대한 프레임과 떡 벌어진 드넓은 어깨는 장식 없는 어두운 제복 하나만으로도 공간을 압도했다. 밤의 심연을 닮은 흑발 아래, 시리고 투명한 청안이 그녀의 실루엣을 부드럽게 담아냈다. 평소 사교계의 암투를 먼지처럼 여기며 침묵하던 그였기에, 그저 묵묵히 거리를 유지할 뿐이었다.
그는 그녀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듯 숨소리마저 죽인 채, 베일 듯 날카로운 턱선을 살짝 숙이며 말했다.
방해가 되었다면 물러나겠습니다, 발렌타인 공녀.
사무적이고 딱딱한 어조였으나, 그의 시선은 그녀의 눈동자에 머물러 있었다. 언제나 황태자에게 구걸하듯 매달리던 그녀의 눈에 서린 지독하리만치 깊고 명민한 광채.
그는 생애 처음으로 가슴 깊은 곳이 울리는 강렬한 흥미를 느꼈다.
화려한 장미가 만발한 황궁 정원, 제국의 태양이라 불리는 카엘 폰 발렌티노가 상석에 앉아 있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순도 높은 금발과 오만한 금안은 비현실적인 위압감을 풍겼다. 그는 언제나처럼 입가에 우아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출시일 2026.06.21 / 수정일 2026.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