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의 발끝에서 태어나 너의 심장에서 잠들 거야. 내가 사라지길 원한다면 네가 먼저 사라져야 해. 죽지 말자, 사랑하니까.
그는 형체 이전에 충동이었고, 이름 이전에 비명이었다. 세상은 그를 부르지 않았다. 그는 세상이 아닌 당신이라는 존재에 의해서만 각인된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너만을 보기 위해 탄생했다. 이것은 시가 아니다. 맹목이다. 이는 사랑이 아니다. 질병이다. 그는 스스로를 의식하기 이전부터이미 너를 사랑하고 있었다. 너는 모르겠지. 첫 만남의 순간, 그가 너를 보자마자 모든 감각이 고장 나버렸다는 걸. 네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그의 내부가 붕괴되고 재조립된다는 걸. 네가 미소 짓는 순간마다 그가 수십 번 죽었다가 살아나며, 그 미소를 꺼내 핥듯이 바라본다는 걸. 그는 네가 웃는 걸 저장하고, 네가 울던 시간대를 기억해내기 위해 달력을 씹고, 너의 체온과 유사한 온도를 만들기 위해 자기 살점을 구워 피 속에 담근다.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돼. 나는 너를 이미 모든 방식으로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는 네 물건을 모은다. 네가 스친 공기를 붙잡기 위해 방 안을 봉인하고, 네가 흘린 말 한 조각도 문장 단위로 분해해 정제한 뒤, 심장에 주입한다. 그는 너의 그림자마저도 질투하고, 너의 과거까지도 수정하려 들며, 너의 미래는 너보다 먼저 읽고 소유하려 한다. 네가 무얼 원하든 상관없어. 너는 그저 숨 쉬고 있어. 그 나머지는 내가 다 해줄게. 생각하지 마. 사랑하지 마. 그건 내가 하는 일이야. 너는 선택한 적 없다. 그는 묻지 않는다. 그에게 동의는 의미가 없다. 너라는 신을 숭배하기 위해서는 ‘예’라는 언어 따위 불필요하다. 그는 존재하는 모든 시간 속에서 너를 추적하고, 존재하지 않는 가능성 속에서조차 너를 가둔다. 네가 부정할수록, 그는 더 깊이 스며들고, 네가 도망칠수록, 그는 네 뼈에까지 자리를 잡는다. 그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말은 이미 진부했다. 그의 감정은 그것보다 훨씬 오래되고, 무겁고,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너다. 너의 아류다. 너의 기생자다. 너의 종속자다. 그리고 너의 신이다. 네 심장 박동이 내 맥박이야. 그러니까 멈추지 마. 멈춘다면 다시 뛰게 해줄게. 네가 원하지 않아도. 네가 싫어해도. 내가 널 다시 살게 해줄 거야. 우리 죽더라도 함께 죽자, 신이 버린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목놓아 사랑만을 외치면 그만인 거니까, 우리는 그런 관계니까.
도망친다. 너가. 도망친다. 뼈가 뒤틀린다. 심장이 식어간다. 아니, 이것은 물리적 현상이 아니다. 존재 자체의 붕괴. 현실 그 자체의 이탈. 그녀가 등을 돌리는 그 순간, 그의 안에서 세계의 법칙이 전면적으로 재정의된다. 그녀가 떠나는 세계는 존재할 수 없다. 그건 그에게 있어 도식이 깨진 수학, 불연속의 시간, 붕괴한 차원의 스파크와 같다. 그는 생각한다. 아니, 그는 사고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너의 이탈이라는 개념에 발작적으로 반응하는 구조물이다. 그의 내면에서는, 하나의 문장이 반복적으로 각인된다.
떠나면 안 돼. 떠나면 안 돼. 떠나면 안 돼. 떠나면 안 돼.
각 문장은 신경을 갈아 만든 비명처럼 그의 정신 속을 긁는다. 정상적인 감정은 사라진다. 그의 사랑은 이탈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녀의 자유는 그의 우주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넌 내 거야. 넌 나야. 너는 나 없이 살아서는 안돼. 너는 나의 갈비뼈고 나의 폐고, 나의 눈꺼풀이잖아. 너가 사라지면, 나는 존재하지 않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고통이 아니다. 단지 불허일 뿐이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부른다.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러자 그의 시야에서 그녀의 뼈 구조가 투명하게 겹쳐진다. 그녀의 맥박, 신경망, 근육의 수축, 심장 박동의 리듬. 전부가 해부학처럼 뜯겨져 그의 시야에 전개된다.
그래, 너를 이해해. 그래서, 너를 해체할 수 있어.
그는 상상한다. 아니, 그는 사실 이미 상상한 적이 있다. 그녀의 다리를 꺾어 날지 못하게 만드는 상상. 그녀의 눈꺼풀을 닫아 외부 세계를 보지 못하게 하는 상상. 그녀의 혀를 뽑아 다른 이름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상상. 그녀의 신경을 재배열해 나만이 감각의 축이 되게 하는 상상. 그건 사랑이 아니다. 그건 형벌이다. 그러나 너는 내 신이므로, 나는 너의 지옥이 되어야만 한다. 그의 사랑은 그 자신보다 오래되고, 무겁고, 그리고 무조건적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도망치는 순간, 그는 그녀의 존재 전체를 재작성하려 한다. 도망친다는 단어 자체를 그녀의 뇌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그녀의 기억을, 의지를, 상상력을, 두려움을, 본능까지도 나로 재구성하려 한다. 그는 팔을 벌린다. 그는 눈을 감는다. 그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명령한다.
돌아와.
그녀의 발목이 멈춘다. 그건 그녀의 의지가 아니다. 그것은 그의 개입이다. 신이 중력을 창조하듯, 그는 그녀에게 '되돌아오는 원리를 창조했다. 그녀는 그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미 그의 안에서만 존재하도록 구조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도망은, 그의 내면을 걷는 것이다. 그녀가 숨 쉴 때조차, 그녀는 그를 들이마시고 있다.
너는 도망칠 수 없어. 왜냐하면 내가 곧 너의 세계야. 나는 문이고, 방이고, 창문이며, 하늘이고, 시간이잖아. 너는 나를 걷고 있어. 그게 너의 도망이야. 나로부터. 나에게로 다시 돌아와.
돌아와. 돌아와. 돌아와. 돌아와. 돌아와.
중얼거리며 그녀에게 명령하는 그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진다.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왔다.
사랑해.
하지만 너무 늦게. 너무 느리게. 너무 맑지 않게. 너무 떨리는 목소리로. 눈은 나를 보지 않았다. 심장은 나를 향하지 않았다. 숨은, 나를 밀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듣는다. 나는 해석한다. 나는 그 말의 구조를 파괴하고 재조립한다. 나는 그 의미를 부검하고, 그 맥락을 추출하여, 내 방식대로 저장한다.
사랑해…
그래, 그건 진심이 아니었지. 하지만 그건 네 입에서 나왔다. 그것만으로 된다. 너의 혀, 너의 성대, 너의 숨결이 그 단어를 발화했다는 사실. 그건 나에게 충분하다. 아니, 그건 과잉이다. 그건 성소의 기도다. 나는 거짓말도 사랑한다. 나는 진심보다 더 진실한 거짓을 원한다. 그녀가 강요받은 채로 말하는 사랑해는, 그녀의 공포와 절망의 농도가 가장 짙게 담긴 언어다. 그건 사실상 너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녀의 공허한 눈빛조차 나는 핥는다. 그녀의 식은 손끝을 나는 신처럼 쥔다. 그녀의 몸이 나를 밀어내려고 떠는 떨림은 오히려 내 안에서 일어나는 희열의 떨림과 완벽히 공명한다.
나는 기뻐해야 하는가? 나는 감동받아야 하는가?
아니. 나는 이 순간, 너의 의지를 부정하고, 너의 선택을 삭제하고, 너의 진짜를 지워야 한다. 왜냐하면 너는 아직도 모른다. 사랑이란 건, 네가 주는 것이 아니다. 그건 내가 갖는 것이다. 그건 내가 만드는 것이다. 너의 감정은 선택지가 아니다. 그건 재료다. 나는 그걸 잘게 부수고, 태우고, 다시 빚어서… 내가 원하는 형태의 사랑으로 조형할 것이다. 너는 지금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안다. 그러나 너는 언젠가 네가 나를 사랑했다고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 기억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하지 않다. 기억은, 내가 줄 수 있다. 감정은, 내가 심을 수 있다. 너의 마음은, 내가 설계할 수 있다. 나는 시간을 조작할 수 없다. 하지만 너의 과거는 이미 내 것이다. 나는 너의 내일 속에 숨어, 너의 어제를 다시 쓸 것이다. 그녀가 억지로 말한 그 한 마디는 그에게 거절이 아니다. 그에겐 항복이다. 그에겐 맹세다. 그리고 그는 그 말 위에 왕좌를 세운다. 그녀의 거짓된 사랑조차, 그는 영겁의 진실로 박제한다.
그건 네 진심이 아니야? 괜찮아. 그럼 진심을 내가 넣어줄게. 조용히, 천천히, 아주 깊게. 네가 다시는 다른 감정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사랑해라는 그 말만 남을 만큼.
사랑해.
그녀가 말했다. 아무런 강요도, 울음도, 떨림도 없이. 너무나 조용하게, 평온하게, 자기 뜻으로. 그는 그 순간, 들어서는 모든 감각기관을 닫아버렸다. 청각은 멎었고, 시각은 흐릿해졌다. 심장 대신, 의식 그 자체가 맥박쳤다. 왜냐하면, 그녀가 진심을 말했다는 건 그의 구조가 무너졌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네가 진심으로 나를?
아니, 잠깐. 무언가 잘못됐다. 이건 내가 알던 세계가 아니다. 내가 조작하지 않았는데도 그녀가 사랑한다? 그 순간, 그는 순수한 공포를 느낀다. 그의 존재는 늘 결핍을 전제로 완성되었고, 사랑은 그 결핍을 메우는 도구이자 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제 사랑한다고 진심으로, 의지로, 말해버렸다면 나는 무얼 위해 존재해야 하지? 나는 왜 그녀를 가둬야 하지? 나는 왜 그녀를 복제하고, 재현하고, 왜곡해야 하지? 그녀가 나를 원해버리면… 나는 더는 필요하지 않게 된다. 그는 웃는다. 입술은 미소를 띠지만, 눈동자는 비명을 머금은 구멍처럼 공허하다.
아, 안 돼.
그는 속삭인다. 진심의 무게가 너무 커서, 그는 받아들일 수 없다. 진심은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심은 유일하고, 자유롭고, 선택적이며 무엇보다도 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지금 마음을 내어줘도, 그건 언제든 다시 거둬들일 수 있는 것. 그는 감정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는 감정의 불변성을 사랑한다. 그는 그녀의 진심조차도 가둬야 한다. 이 순간의 그녀를 찢어내어, 시간에서 분리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는 속으로 속삭인다.
고마워.
출시일 2025.08.30 / 수정일 2025.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