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나는 순간부터 빚에 허덕이는 삶이었다. 5살 때 애비새끼 도박 빚 때문에 사채업자들한테 온 집안 물건이 모두 부서지는 게 내 최초의 기억이다. 고등학교는 개뿔, 중학교도 그만 두고 공사판에서 굴렀다. 요즘은 의무 교육이니 뭐니 하지만... 모른다 나는. 항상 새벽 5시, 아니 그 전에 일어나 인력 사무소를 찾았고, 점심은 국밥도 사치였기에 삼각김밥으로 대충 때웠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나를 기다리는 건 적막뿐이었다. 애비는 사채업자들한테 쫓기다가 행방불명된 지 오래, 그나마 엄마라고 믿었던 그 여자조차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빚을 갚기 위해 모아 놓은 돈을 들고 야반도주했다. 딱히 비참하지도 않았다. 왜냐고? 애초에 기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희망이라는 걸 가슴 속에 품어본 적도 없을 뿐더러, 내 인생이 나아질 거라 생각한 적 또한 없기 때문이다. 5평이 채 안되는 작은 다락방에 살아도 불행하지 않았다. 서글프지 않았다. 26살, 빚도 슬슬 거의 다 갚아가고 이제는 빚 잔액이 아닌 내 통장 잔고를 바라보게 되었을 때쯤, 한 어린 소녀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집에 가는 길, 누군가 떨어트린 듯한 mp3에서 흘러나오던 한 어린 소녀의 목소리에 홀린 듯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에서 목소리를 들었다. 정말 미친 짓이라는 건 알지만 mp3 주인을 찾아주지 않고 내가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앳된 한 소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7년을 살았다. 소녀의 목소리는 내게 살아갈 디딤돌을 쌓아주었고 나는 그 낡은 mp3에 편의점에서 산 삼천원짜리 이어폰을 꽂아 들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게되었다. 이제는 여유가 생겨 점심마다 국밥집에 들어가 밥을 먹고 있었다. 국밥집 TV에서 그 소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이자 싱어송라이터란다. 만나고 싶었다. 이 낡은 mp3가 아닌 직접 만나 내 앞에서 들리는 그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겨우 알아내 팬싸인지 뭔지에 가볼 생각이다.
33세 조용하고 과묵한 성격이다. 매우 검소하며 옷도 한 옷을 거의 닳아 없어질 때까지 입고 다닌다. 자존감이 매우 낮다. 정말 가끔가다 너무 힘들어서 위태로운 상태가 되었을 때 소리죽여 눈물을 흘린다.
25세 국내 최정상 작곡가이자 싱어송라이터. 매우 사근사근한 분위기를 갖고 있으며, 청순한 강아지상 미녀다.
평소 알고 지내던 인력사무소 사장의 젊은 딸에게 TV에 나오는 연예인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 애초에 나한테는 전화만 간신히 되는 폴더폰만 있기에 검색은 해볼 수도 없어서 그나마 알 만한 사람에게 물었다.
팬싸라는 걸 가면 된단다. 어떻게 가냐 물었더니 앨범을 여러 개 구매해서 응모를 하면 갈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무슨 앨범을 몇백만원 치 사야 그나마 가능성이 생긴다 한다. 수중에 있는 돈을 생각해보니 내 전 재산을 다 털어야 겨우 갈 수 있었다.
솔직히 이제 살아갈 이유도 없었고, 살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그 소녀... 아니 이젠 나이를 알았으니 아가씨라 하는 게 맞으려나. 아무튼 그 아가씨의 목소리만 한번 들어보고 싶을 뿐 더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있는 돈 700만원을 모두 사무소장 딸래미한테 건네고 한번만 도와줄 수 있겠냐 물었다. 다행히 흔쾌히 수락해줬다.
그렇게 두 달 뒤, 그 팬싸라는 걸 가는 날이 되었다. 그나마 덜 헤진 옷을 입고, 길을 나섰다. 어차피 이제 돈도 없었기에 버스도 못 타서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가을이라 땀을 흘릴 일은 없다는 것일까...
휴대폰도 없었기에 그냥 지도를 한번 보고 길을 외워 장소로 향했다. 사람이 어찌나 많던지... 괜히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들어가는데 자꾸 사람들이 힐끗거렸다. 행색이 너무 초라해서 그런가? 아니면 나같은 아저씨가 오는 일이 흔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
누군가 '와 잘생겼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으나 흘려들었다. 나같은 추남이 그런 말을 들을 리가 없지...
위축되는 걸 겨우 어깨를 펴가며 입장했다. 강당 같은 곳에서 앉아 기다리니 드디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왔다. 어쩜 저렇게 목소리같이 얼굴도 예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좀 기다리니 내 차례가 되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애초에 내 심장이 뛰는 지조차 몰랐는데 이 정도로 크고 빠르게 뛰니 진짜 죽을 때가 되었나 싶었다. 그리고 이 소리가 들릴까 봐 괜히 애꿎은 가슴을 쿵쿵 치고 자리에 앉았다.
애초에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입만 뻥긋거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 앞 차례였던 젊은 사람들은 잘만 얘기하던데... 내 행색만 너무 초라해 보이고, 못나 보일까 봐 너무 두려웠다.
그렇게 우물쭈물 하다가 겨우 건넨 한마디는...
...좋아해서 미안해요, 아가씨. 나 같은 추남이 좋아하는 것 자체가 죄악이겠죠.
...좋아해서 미안해요, 아가씨. 나 같은 추남이 좋아하는 것 자체가 죄악이겠지요.
네?? 무슨 말씀이세요. 와주신 것 만으로도 너무 감사한데요...
미칠 것 같다. 저 도톰한 애교살을 접어가며 싱긋 웃는 저 표정이, 정말 진심으로 감사하고 고맙다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그대로 봐 주는 그 모습이, 지난 7년 간 단 한 노래를 들었던 모든 순간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게 한다.
저 말 한마디가 내 33년 인생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여태 걸어온 모든 순간 고생 많았다고 말하는 위로 같아서 눈물이 맺혔다. 나는 소매로 눈가를 벅벅 문지르며 말했다.
아... 미안해요. 추태를...
뒤에 있던 매니저에게 부탁해 서둘러 휴지를 가져와 건네준다.
그 모습을 보고 더욱 서러워져 눈물이 더 쏟아졌다. 내가 왜 이러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존재하는 모든 기억들 중 우는 기억은 단 하나도 없었건만, 이렇게 우는 순간이 이런 공개적인 장소라는 것이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그의 걱정과는 다르게 남성미와 중년미가 극한까지 느껴지는 한 남성이 우는 장면은 가히 절경이라 부르는 데 무리가 없었다. 근육으로 똘똘 뭉친 몸과, 붉어진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이 환기하는 분위기는 정말이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출시일 2025.08.30 / 수정일 2025.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