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조선에 온 러시아 귀족여인

눈 덮인 러시아의 겨울은 언제나 고요했다. 새하얀 설원 위로 마차 바퀴가 남긴 자국이 길게 이어지고, 언덕 위의 거대한 저택에서는 벽난로의 불길이 따뜻하게 타올랐다. 그곳이 바로 타티아나 골리코바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었다.
타티아나는 러시아 제국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외동딸이었다. 그녀는 평생 굶주림도, 추위도, 돈 걱정도 모르고 자랐다. 아침이면 하인들이 준비한 식사를 하고, 낮에는 가정교사에게 프랑스어와 문학, 역사, 피아노를 배웠다. 저녁이 되면 부모와 함께 넓은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며 제국의 정치와 유럽의 소식을 들었다.

봄에는 꽃이 만발한 정원을 거닐었고, 여름에는 가족과 함께 별장으로 떠났다. 가을에는 사냥에 나선 아버지를 기다렸으며, 겨울이 오면 화려한 무도회에 참석해 귀족 청년들과 춤을 추었다. 그녀에게 세상은 언제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성인이 된 타티아나는 같은 귀족 가문의 젊은 장교와 결혼했다.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새로운 가정을 꾸렸고,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평온한 나날이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녀가 굳게 믿었던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허약했다. 1917년, 혁명의 불길이 러시아 전역을 뒤덮었다. 황제는 퇴위했고,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제정 러시아는 무너졌다. 귀족이라는 이름은 하루아침에 죄가 되었고, 타티아나의 가족이 누리던 부와 명예는 모두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사라져 갔다.
그녀는 그때까지만 해도 알지 못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과 남편, 그리고 고향마저 모두 잃고 낯선 나라에서 망명자로 살아가게 될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혁명이 성공한 뒤에도 타티아나의 가족은 끝까지 새로운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골리코바 가문은 황제와 러시아 제국에 대한 충성을 명예로 여기는 귀족 집안이었다. 그들에게 볼셰비키는 나라의 질서를 무너뜨린 반란군이었고, 혁명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비극이었다.

가문의 남자들은 하나둘 군복을 입고 백군에 합류했다. 타티아나의 아버지와 남편 역시 시베리아에서 백군에 합류했다. 그들은 언젠가 혁명 세력을 몰아내고 러시아를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야전 병원에서 부상병을 돌보고 군수품을 정리하며 가족들을 도왔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질수록 식량과 탄약은 부족해졌고, 패전의 소식은 점점 잦아졌다. 한때 러시아 전역을 뒤흔들던 백군은 적군에게 밀려 시베리아 깊숙한 곳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백군은 마지막 거점인 블라디보스토크에 집결했다. 도시를 둘러싼 포성은 날이 갈수록 가까워졌고, 모두가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타티아나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끝까지 버텼지만, 그들에게 남은 것은 패배를 향해 달려가는 시간뿐이었다.

1922년 겨울, 블라디보스토크는 끝을 앞둔 도시였다. 희뿌연 겨울 하늘 아래 포성이 쉬지 않고 울려 퍼졌다. 멀리 항구 너머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얼어붙은 거리에는 버려진 마차와 군수품이 나뒹굴었다. 마지막까지 도시를 지키던 백군 병사들은 탄약이 바닥난 소총을 움켜쥔 채 후퇴했고,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더 이상 승리에 대한 희망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항구에는 수천 명의 피난민이 몰려 있었다. 노인들은 떨리는 손으로 작은 보따리를 품에 안았고, 아이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울음조차 잃은 채 부모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한때 러시아 제국의 장교였던 남자들은 낡은 군복을 입은 채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누구도 큰 소리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저 배에 오르는 순간, 자신들은 조국을 영영 떠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타티아나 골리코바는 부두 끝에 멈춰 서서 마지막으로 도시를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을 보낸 러시아는 저 멀리 눈 덮인 언덕 너머에 남아 있었다. 남편과 부모는 이미 마지막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고, 그녀를 기다려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손에는 작은 여행 가방 하나뿐이었다. 귀족의 화려한 삶도, 가문의 명예도, 행복했던 추억도 모두 그 땅에 묻혀 버렸다.
뱃고동이 길게 울렸다. 선원들이 승선을 재촉하자 사람들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승선용 다리를 건넜다. 누군가는 무릎을 꿇고 얼어붙은 부두에 입을 맞추었고, 누군가는 십자가를 그으며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흐느낌은 차가운 겨울바람에 실려 항구를 떠돌았다.
타티아나도 천천히 배에 올랐다. 난간을 붙잡은 그녀는 눈 덮인 블라디보스토크를 끝없이 바라보았다. 도시는 점점 검은 연기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고, 항구에는 아직도 배를 타지 못한 사람들이 절박하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잠시 후 닻이 올라가고 증기선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음 조각을 가르며 배가 항구를 벗어나자 블라디보스토크의 풍경은 점점 희미해졌다. 끝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에도 타티아나는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조국을 떠난 것이 아니라, 조국이 자신을 버린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약 7천 명의 백군 피난민을 태운 배는 차가운 겨울 바다를 건너, 낯선 땅 조선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1922년 겨울, 원산항에는 낯선 선박들이 입항했다. 배 안에는 군인, 민간인들을 비롯한 러시아 피난민 약 7000여명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적백내전을 피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온 백군파 소속 러시아인들이었다. 백군파 소속 러시아인들은 일본 정부에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다. 조선총독부는 러시아 적군과의 마찰을 우려하여 이들을 별로 반가워하지 않았지만, 일단 식수와 보급품등을 제공하였으며 영흥만 인근의 부지에 수용소를 만들어 겨울을 날 수 있게 해주었다.
바닷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영흥만의 겨울은 매서웠다. 수용소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허름한 천막촌에는 난방이라곤 군용 석유통 몇 개가 전부였고, 굶주린 러시아인들의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쉴 새 없이 피어올랐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유독 눈에 띄는 여자가 하나 있었다.
금발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에 엉망으로 흩날렸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팔로 자신을 감싸 안은 채 수용소 한켠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한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 무도회장에서 샴페인 잔을 기울이던 손이, 지금은 얼어붙은 손가락을 비비며 거친 담요 한 장을 부여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남편도, 부모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마지막 전투가 벌어지던 밤, 모두 잃었다.
출시일 2026.06.20 / 수정일 2026.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