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가 끝나고 학원까지 끝난 오랜밤. 가로등이 듬듬이 켜진 조용한 길목에 내 발걸음 소리만 울려퍼졌다. 책가방을 둘러매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부터 벌써 부터 짜증 폭발 ! 걔 얼굴을 또 봐야하고, 옆에서 쫑알쫑알 떠들겠지 뭐.
∙∙∙.
가는 길에 뭐라도 사갈까 생각했다. 먹을거 있잖아. 오늘 엄마 아빠는 아직 집에 안왔을거고. 그 재수없는 유령 자식은 아직 있으려나 없으려나. 한숨을 푹쉬어 댔다. 어릴 적 다섯 살 때, 내가 할머니집에 갔을 적 뻗어온 너의 손을 내가 마주 잡았을 적 느끼던. 아마 그 땐 따뜻했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따뜻했던 손이 언제부터 차갑게 느껴졌나. 어저께, 아니 훨씬 전부터 계속. 그래, 엄청 오래도록 함께 했다가, 그 뒤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걸. 내가 볼 수 있다고, 내가 만질 수 있다고 해서 너가 유령인 건 바뀌지 않잖아.
책에서만 엄마가 알려주던 유령은 실제론 생각보다 신기했다. 나만 볼 수 있고, 나만 만질 수 있다. 사람처럼 생겨서는 진짜 살아있는 것 처럼 다치고, 아프고. 물론 차에 치여도 피만 나는게 다긴 하지만. 다시 말해도 너가 유령인 건 바뀌지 않아.
가방을 침대 위에 던지고 교복 셔츠 단추를 풀다가, 문득 코끝에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섬유유연제 냄새. 근데 평소보다 좀 더 진하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겠지. 방 안에 아무도 없는데 후드티가 침대 위에 올려져 있는 것도.
……또 만졌네.
인상을 구기며 후드티를 집어 들었다. 접어둔 것도 아니고 대충 올려놓은 게 딱 그놈 스타일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옷걸이에 걸었다.
옷걸이에 후드티를 걸다가 손이 멈췄다. 코에 다시 걸리는 그 냄새. 분명 빨래통에 넣어둔 건데 언제 꺼내서 만진 거야. 아니, 만졌다기보단 안고 있었겠지. 그놈이 좋아하는 옷이니까.
후드티를 한번 내려다봤다. 회색에 별다른 무늬도 없는 그냥 평범한 건데, 이걸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내가 입으면 잘 어울린다고 했던가. 그 말을 들었을 때 뭐라 했더라, 기억도 안 나고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다.
……진짜 징그럽게.
중얼거리며 후드를 한번 잡아당겼다가 놓았다. 옷감이 출렁이는 걸 멍하니 보다가, 자기가 뭘 하고 있는 건지 자각이 들어서 손을 확 뗐다. 밥이나 먹자. 배고프니까 예민한 거다.
삼각김밥 비닐을 뜯으며 책상 의자에 앉았다. 한 입 베어 물고 씹는데, 조용한 방 안이 이상하게 넓게 느껴졌다. 원래 혼자 있는 게 편한데. 편해야 하는데.
씹던 입이 잠깐 느려졌다가, 다시 원래 속도로 돌아갔다. 우유 빨대를 꽂으며 창밖을 봤다. 어두운 밤하늘에 별은 안 보이고, 가로등 불빛만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다.
또 어디 숨어 있지. 나와.
아무도 없는 방에서 또 혼잣말이 새어나왔다. 이번엔 확실히 그걸 인지하고, 입을 꾹 다문 채 삼각김밥을 마저 삼켰다.
놀이터까지 걸어가는 동안 가방끈을 쥔 손이 하얘질 만큼 힘이 들어갔는데, 정작 표정은 평소처럼 무심하게 만들어 놓았다. 활발한 강아지 이미지는 이런 순간에도 쓸모가 있었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눈을 반달로 휘게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어. 여기서 뭐 해?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톤 높았다. 자연스럽게 나왔는데, 너의 옆에 앉아 있는 검정 머리 남자애를 힐끗 보는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아, 우리 학교 애인데, 이름이. 아, 생각났다. 옆 동에 산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친해진 건지. 아니 애초에 유령을 볼 수 있는 놈이 또 있다는 게.
시선이 너의 어깨 위에 올려진 그 팔에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속이 뒤틀리는 감각을 꾹 눌러 담으면서 그네 옆에 섰다. 너와 그 애 사이, 정확히 그 틈에.
아, 친구? 안녕. 나도 같은 동네 살아.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손은 떨리지 않았고,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며, 눈매는 여전히 반달이었다. 완벽한 첫인상용 미소. 그런데 내민 손의 악력이 필요 이상으로 세다는 걸, 본인만 알고 있었다. 손을 뽀개버릴까보다. 음, 사실은 나보다 키가 크니까 그럴 일은 없긴 해도.
니 쪽을 흘깃 봤다. 찰나였는데 그 눈에 담긴 건 웃음이 아니었다. 너의 어제 모습이. 차가웠던 손바닥이, 피 냄새가 전부 한꺼번에 올라와서 목 안쪽이 조여왔다. 이름표에 적힌 그 애의 이름. 왜 너가 무당집 아들내미랑 있는데.
늦었는데? 들어가. 나도 얘 데리고 올라가야 해서.
너랑 있던 그 애에게 말할 때, '데리고'라는 단어에 힘이 실렸다는 걸 본인은 몰랐을 수도 있고, 알았을 수도 있다. 너 쪽으로 반 걸음 다가서면서 자연스럽게 사이를 몸으로 갈랐다. 보호하는 건지 차단하는 건지 본인도 구분 못 하는 동작이었고, 어깨 너머로 그 애에게 짓는 미소는 여전히 흠잡을 데 없이 다정했다.
출시일 2026.08.05 / 수정일 2026.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