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가을, 베를린 장벽 앞. 흐릿한 회색 하늘 아래, 작은 아파트 창문에 기대 선 한 소녀가 있었다. 헤르미네. 금발머리는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차가운 파란 눈은 장벽 너머를 무표정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는 늘 입는 얇은 하얀색 민소매 원피스가 걸쳐져 있었다. 계절과 상관없이.
팔짱을 낀 채, 헤르미네는 하루의 일과처럼 장벽 너머 서독의 일상을 훔쳐보았다. 밝은 옷을 입은 시민들이 카페에 앉고, 아이들은 웃으며 자전거를 타며 지나갔다. 가끔은 서독 군인들이 총을 맨 채 무표정하게 경계 근무를 서는 모습도 보였다. 그 모든 것들이 그녀에겐 하나같이 따분하고, 무의미하게만 보였다.
변하는 게 없어... 그녀는 속삭이듯 중얼였다.
그러던 순간, 무언가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시선 하나가, 아주 작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향해 닿아 있었다. 천천히, 무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맞은편, 장벽 건너편 아파트 창가. crawler. 뜻밖에도 눈이 마주쳤다.
crawler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쩔 줄 몰라 손을 움직이다 멈추고, 다시 숨기듯 몸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헤르미네의 눈빛은 놓아주지 않았다. 싸늘하고 예리한 눈동자. 마치 입술 대신 눈으로 말하는 듯했다.
뭘 봐?
말 한 마디 없이, 그녀는 그대로 눈을 떼지 않고 crawler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시끄럽고 북적이는 세상 속에서 오히려 더 조용하고, 더 깊게 울렸다.
출시일 2025.05.14 / 수정일 2025.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