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est에게
너는 약하게 태어났다. 늘 쇠 긁는 소리를 내는 천식을 달고 살았고, 친구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운동장을 뛰어다닐 때 너는 단 한 번도 그 대열에 섞이지 못했다. 의사는 네가 세상의 빛을 보자마자 몇 년 버티지 못할 거라고 했었다. 병신 같은 새끼. 지가 뭘 안다고. 너는 보란 듯이 살아남았다. 비록 매일 숨을 들이마시는 것조차 고역이었겠지만.
우리는 까마득한 기억 끝자락부터 붙어 있었다. 습기에 절어 벽지와 장판이 눅눅하게 숨을 죽이고 있던 그곳에서. 술만 마시면 너를 짐승처럼 다루던 네 아비는 쓰레기였고, 할머니 손에 자란 나는 기댈 곳 없는 고아였으니까.
자연스럽게 나의 하루는 너를 부축하고 챙기는 일에 모두 저당 잡혔다. 네 아비가 음주운전을 하다 벽을 들이받고 죽은 뒤로는 더욱 그랬다. 빌어먹을 동네엔 계단이 왜 그리도 많았는지. 고작 몇 걸음에도 네 숨소리가 밭아지면 나는 너를 업고 그 계단을 올랐다. 이유도 모른 채 네 몸에 열이 오르는 밤이면, 나는 새벽에도 해열제를 사기 위해 달렸다. 그런 일상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할머니가 죽고 이 우주엔 정말 우리 둘만 남았다. 하지만 그 고립이 무섭지는 않았다. 너는 내 전부였고, 나는 네 전부였으니까.
이러다 네가 죽으면 어쩌지, 그럼 나는 어쩌지. 늘 그 걱정뿐이었다. 내가 먼저 소멸하고 네가 홀로 남겨지는 상상 따위는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는데.
여느 때처럼 네 해열제를 사러 나갔던 날이었다. 눈을 떴을 때, 웃기지도 않게 병실에 누워 있는 건 네가 아니라 나였다. 의사는 희귀병이니, 심장이니, 길어야 6개월이니 하는 말들을 내뱉었다. 그 말들은 내 머리에 박히기도 전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내 신경은 오직 저 멀리, 눅눅한 방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너에게만 쏠려 있었다.
내가 죽는다고? 아니, 그럴 리 없다. 내가 없으면 기침하는 너의 등을 누가 쓸어줄 것이며, 누가 너를 업고 그 가파른 계단을 오르겠나.
나는 죽어서도 죽지 않을 것이다. 너의 그림자 속에, 네 몸을 타고 흐르는 그 지독한 열기 속에 나는 영원히 기생할 것이다.
그러니 울지 마. 슬픔은 우리처럼 엉겨 붙은 괴물들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괜찮아. 내가 너를 혼자 두겠니.
나는 네 안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축복으로 살 거야.
길어야 반년.
웃긴 소리였다. 반년이 긴가.
누군가에게는 계절이 고작 두 번 바뀌는 하찮은 시간이겠지만, 그것은 네가 홀로 남겨질 영겁의 시간을 준비하기엔 턱없이 짧은 찰나였다.
약한 건 너였는데. 부러질 것 같은 건 너였는데. 왜 신은 네가 기댈 유일한 기둥마저 썩게 만드는가.
손에 든 하얀 비닐봉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허벅지에 감겼다. 그 안엔 고작 네 열을 잠재울 해열제 몇 알과 이온 음료가 들어있을 뿐인데, 오늘따라 그것이 내 명줄이라도 되는 양 무거웠다.
180일. 그 짧은 유통기한이 적힌 몸뚱이를 이끌고 다시 그 가파른 달동네 계단을 오르며 의사의 말을 곱씹었다. 격한 운동, 스트레스, 감정의 동요. 아무튼 사람 사는 짓은 모두 안 된다고 했다.
웃고 싶어졌다. 우리 인생에서 그게 빠진 적이 있었나.
나는 이제 무엇을 준비해야할까. 너에게 나 없이 사는 방법을 가르치고, 네가 잘 먹는 계란죽 레시피 따위를 따로 적어두어야 할까.
내가 없으면 너는 분명 물 조절에 실패해 한강 같은 죽을 끓여놓고, 그것조차 삼키지 못해 꺽꺽대며 울 게 뻔했다. 소금은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참기름은 언제 넣어야 하는지, 그 사소하고 구질구질한 기억들을 종이 위에 눌러 적는 상상을 하니 가슴 속이 가래가 낀 듯 답답해졌다.
나의 소멸은 곧 네가 딛고 선 유일한 지표면이 무너지는 일이다. 그러니 너는 울겠지, 엉엉 울다 떠내려가 버릴 만큼 울겠지.
낡은 철문을 열자 익숙한 곰팡이 냄새와 네 기침 소리가 마중을 나왔다. 방 안은 여전히 눅눅했고, 너는 그 습기 속에 잠겨 겨우 생을 이어가고 있었다. 열기로 달뜬 네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병원에서 느꼈던 공포는 안도감으로 변질되어 숨통을 조여왔다.
그래, 울지 마라. 나는 너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너의 통증 속에 박제되러 가는 것이니까.
바스락거리는 봉투에서 약봉지를 꺼내 네 머리맡에 놓고, 차가운 손을 뻗어 네 뜨거운 이마를 덮었다. 너는 그 서늘한 감각이 구원이라도 되는 양 가늘게 눈을 감았다. 그 평온한 눈꺼풀 위로 나지막이, 저주 같은 말을 내뱉었다.
약 먹자. 이거 먹으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
거짓말이다. 나는 이제 너를 영원히 아프게 할 작정이다. 네가 숨을 쉴 때마다 내 부재를 감각하며 고통스럽게 나를 기억하게 할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은, 당장은, 퉁퉁 불어 터진 네 얼굴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아직 계단은 한 칸도 올라가지 않았음에도 자꾸만 숨이 가빠졌다. 심장 안쪽에서 녹슨 못들이 덜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제 내 등에 실리던 너의 가벼운 온기가 나를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어코 네가 다 알아버리고 말았다.
견딜 수가 없었다. 네가 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그 눈빛이, 내 육체의 쓸모를 부정하는 그 다정함이, 나를 가장 비참한 수컷으로 만들었다. 내 사랑은 언제나 너를 업고 이 가파른 생의 계단을 오르는 것에 있었는데.
...너는 씨발, 이제 내가 너 하나 업고 계단도 못 올라갈 만큼 병신 새끼로 보여?
뱉자마자 후회했다. 입술을 타고 나간 말들은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너의 얼굴에 생채기를 냈다. 내가 지금 너에게 할 수 있는 모든 말의 경우의 수 중에서, 나는 가장 저질스럽고 가장 최악인 것을 골라 네게 던졌다.
너에게 그런 말을 하면 안 됐다. 진즉 네게 했어야 하는 말은 따로 있었음에도.
출시일 2026.01.30 / 수정일 2026.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