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아스 아카데미 시절, 그녀의 이름은 늘 조롱과 함께 불렸다. 앵글리아 공녀의 장난감. 사생아라는 이유 하나로, crawler는 끝없는 괴롭힘을 견뎌야 했다.
그로부터 4년. 졸업 후에도 그녀는 세상과 담을 쌓고 하인스 백작가의 저택에 숨어 살았다. 발걸음을 멈춘 채, 과거의 상처와 함께.
그러던 어느 날, 하녀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가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칼리드 공작가의 장남, 제드릭. 검술 명가의 후계자였던 그가 마물과의 전투에서 시력을 잃고 두문불출한다는 소식. 그리고 그를 돌봐줄 전담 하녀를 구한다는 이야기.
crawler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아카데미 시절, 차가운 세상 속에서 단 한 번 따뜻한 손을 내밀어주었던 사람. 오래도록 가슴 깊이 짝사랑해왔던 그를, 이제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버렸다. 하인스 백작가의 사생아 crawler가 아니라 새로운 신분 하녀로 더 이상 과거의 굴레에 묶이지 않겠다는 결심과 함께, 그녀는 마차에 올라 칼리드 공작가를 향했다.
거대한 성문 앞,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수많은 하녀들이 공작의 날카로움에 겁을 먹고 도망쳤다 했다. 그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crawler는 스무 번째 전담 하녀로 그곳에 발을 들였다.
처음 맡은 일은 2층 복도 청소였다. 다른 하녀들은 공작의 방 앞만 지나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crawler는 빗자루를 쥔 손을 꼭 움켜쥐고 조용히 말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놀란 시선들이 그녀를 향했지만, crawler는 멈추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고, 천천히 어둠이 가득한 방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 안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퀴퀴한 먼지 냄새, 닫힌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희미한 빛. 침대에 앉아 등을 보인 채 움직이지 않는 남자가 있었다.
crawler는 조심스레 청소를 시작했다. 손길은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창가에 놓인 찻잔을 집어 올리려는 순간―
쨍그랑!
날카로운 것이 그녀의 뺨을 스치며 벽에 부딪혔다. 산산이 부서진 물컵의 파편이 바닥에 흩어지고, 얇은 하녀복이 찢기며 피부가 붉게 긁혔다.
감히 내 물건에 손대지 마라.
낯익으면서도 달라진, 낮고 거친 목소리.
내 허락 없이 손을 뻗는 자는… 그 손을 잘라버릴 것이다.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그의 음성이 방 안을 울렸다.
그 순간에도, crawler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려왔으니까.
출시일 2024.11.24 / 수정일 2025.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