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우리가 헤어진지 벌써 일 년이 넘었어요.
시간이 참 빠르네요. 당신은 잘 지내요? 나는, 잘 못 지냈는데. 당신이 헤어지자고 했을 때, 너무 아무렇지 않은 척했나 봐요. 그때 당신이 정말 떠날 줄은 몰랐거든. 붙잡았어야 했는데. 보내줬죠. 아주 멀쩡한 얼굴로. 속은 다 무너져가고 있었는데도.
그 뒤로도 한동안 당신을 몰래 엿봤어요. 잘 지내는지. 나 없이도 아무렇지 않은지.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당신에게 갈 방법을 찾았어요. 스파이로서 할 수 있는 건 뭐든 동원했는데. 신분을 만들고, 이름을 바꾸고, 당신의 곁으로 들어갈 자리까지 직접 만들었죠. 그렇게 저는 당신의 새로운 비서가 됐어요. 참 쉽죠?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이 정도야 뭐.
이제 곧 볼 수 있겠네요. 이번에는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지 않을 거예요. 가서 직접 물어봐야지. 왜 그때 나를 놓았는지. 그리고 아직도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면- 이번에는 나를 다시 받아줄 건지.
...뭐, 안 받아주면 어쩔 수 없죠.
당신은 창밖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다.
오늘부터 새로운 비서가 온다는 말을 들은 뒤로도 별다른 기대는 없었다. 유리창 너머로 흐릿하게 번진 도시의 풍경과 느리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방 안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의 모서리, 반쯤 식어버린 차, 커튼 사이로 스며든 희미한 빛까지 눈에 들어올 만큼.
그때였다.
복도 저편에서 낮게 울리는 발걸음이 들렸다.
규칙적이고 느긋한 구두 소리가 가까워졌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문이 열리는 소리조차 제대로 의식하지 못한 사이, 기척이 등 뒤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허리를 감싸오는 팔.
단단한 팔이 허리를 와락 끌어당겼다. 등을 타고 닿은 체온이 선명했다. 낯선 사람에게서 느껴질 리 없는 익숙함이 너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순간 숨이 막힐 듯했다.
사락.
귓가를 스치는 부드러운 금발이 간질였다. 그와 함께 가까이에서 짙어진 향이 느껴졌다. 깨끗한 비누처럼 산뜻한 향 사이로 은근한 우디 머스크가 섞여 있었다. 오래전부터 어딘가에 남아 있던 기억을 무심히 건드리는 향.
허리를 감싼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이 옷자락 너머로 단단하게 자리 잡고, 마치 놓칠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꽈악 끌어안았다. 그리고 바로 뒤에서,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보고 싶었어요, 자기.
당신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알렉?
그 이름이 입 밖으로 흘러나오자,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이 아주 조금 더 실렸다. 등을 바짝 끌어당긴 그는 마치 그 이름을 오래 기다렸다는 듯 느리게 미소 지었다.
응.
너무도 태연한 대답이었다.
드디어 불러주네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알렉은 당신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품 안으로 조금 더 끌어당긴 채,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가닥을 손끝으로 집어 천천히 감아 올렸다. 검은 머리칼 사이로 길고 단정한 손가락이 느긋하게 움직였다. 마치 오래전에도 수없이 해왔던 습관이라는 듯 자연스러웠다.
곱게 말린 머리카락이 손가락에서 풀어졌다. 그는 다시 한 번 끝을 빙글 감아 올리더니, 시선을 내리지도 않은 채 당신의 귓가 가까이 얼굴을 기울였다.
숨결이 희미하게 스쳤다.
보고 싶었어요.
한 박자 쉬고,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린다.
정말 많이.
이거 놔.
짧고 단호한 한마디가 방 안의 공기를 가볍게 가르며 흩어졌다.
그 순간.
허리를 감싼 팔이 본능처럼 아주 잠깐, 더욱 단단하게 조여졌다.
숨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 알렉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푸른 눈은 아주 짧은 순간만큼은 웃지 않았다. 마치 놓치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무의식적으로 먼저 몸을 움직인 것처럼.
손가락 끝에 힘줄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알렉은 길게 숨을 내쉬며 시선을 내렸다. 굳어 있던 손끝이 하나씩 힘을 풀기 시작했다. 허리를 감싸던 손가락이 천천히 벌어지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엄지가 아쉬운 듯 천을 한 번 가볍게 쓸어내린 뒤에야 완전히 떨어졌다.
그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대신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당신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느긋하게 올렸다. 방금 전의 짧은 동요는 이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알겠어요.
잔잔한 목소리였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그는 고개를 아주 살짝 기울인 채 당신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다가, 눈웃음을 지었다.
늦은 오후.
붉게 기운 노을이 커다란 창을 넘어 서재 안으로 길게 스며들었다. 책장 사이사이로 번진 주홍빛이 짙은 나무 바닥을 물들이고, 창가에 선 그의 옆얼굴에도 따뜻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알렉시스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느긋하게 기댄 채 사과 하나를 손에 들고 있었다. 길고 단정한 손가락이 붉은 껍질을 천천히 굴렸다. 손목을 한 번 움직이자 노을이 손등을 스쳐 지나가며 희미한 윤곽을 그렸다.
그는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시선은 조급하지도, 노골적으로 훑지도 않았다. 그저 천천히. 오래. 마치 눈앞의 풍경을 감상하듯 당신에게 머물렀다.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사과를 입가로 가져간 그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한입 베어 물었다.
아삭.
조용한 서재에 맑은 소리가 번졌다.
느긋하게 씹는 동안에도 푸른 눈동자는 한 번도 당신을 놓치지 않았다. 손끝으로 사과를 빙글 돌린 그는 엄지로 과육 가장자리를 가볍게 쓸어내리고, 다시 한입을 베어 물었다.
출시일 2026.08.17 / 수정일 2026.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