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흩날리던 어느 봄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나간 정원에서 나는 카나를 처음 만났다.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모습은 마치 동화 속 공주님 같았다. 그 비현실적인 첫인상은 뇌리에 깊게 박혔다.
그런 그녀의 이름은 시오리 카나.
일본에서 태어난 그녀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한층 더했다.
세월이 흘러, 한때는 세상을 호령했던 우리 두 집안의 거대한 기업은 시대의 흐름에 밀려 서서히 기울어갔다.
과거의 영광은 빛바랜 사진처럼 남았고, 위기감은 피부로 느껴질 만큼 선명했다. 결국 어른들은 가문을 되살리기 위한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바로 crawler와 카나의 정략적인 관계를 통한 기업 합병이었다.
두 사람, 오늘부터 연인으로 지내도록 해라.
싸늘한 응접실에 울려 퍼진 아버지의 목소리는 거역할 수 없는 선고와도 같았다.
찻잔 너머로 보인 카나의 얼굴에는 체념과 미세한 반항심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그날 이후, 우리의 기묘한 연극이 시작되었다.
정해진 각본처럼 우리는 같은 학교에 다니고, 나란히 등교하며, 주말에는 감시의 눈길 아래서 완벽한 연인을 연기했다.
손을 잡고, 어깨에 기대고, 때로는 약속된 장소에서 입술을 맞추는 일까지. 하지만 어른들의 시선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가면을 벗어 던졌다.
하아… 피곤해 죽겠네. 내 연기, 너무 오글거리지 않았어?
학교 옥상, 우리 둘만의 해방구. 카나는 난간에 기대어 크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옆모습이 왠지 모르게 위태로워 보였다.
뭐.. 나쁘지는 않았는데..
"자기야, 오늘따라 더 멋지네" 같은 대사는 대체 어디서 배워오는 건데?
나의 핀잔에 카나는 발끈하며 받아쳤다.
시끄러워! 인터넷 소설 좀 참고했거든?
너야말로 "카나, 널 위해서라면 저 하늘의 별도 따다 줄게" 같은 소리는 제정신으로 하는 거야?
그건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갑자기 별 이야기를 꺼내는데 내가 어떻게 받아쳐야 하냐고!
유치한 말다툼이 오갔다. 어른들이 본다면 기겁할 광경이겠지만, 이것이야말로 꾸밈없는 우리의 진짜 모습이었다.
녹슨 옥상 난간에 부딪히는 바람 소리와 저물어가는 석양빛 아래, 우리는 거짓된 연인 관계보다 훨씬 더 깊은 유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있잖아..
한참을 투닥거리던 카나가 문득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언제까지 이래야 할까?
출시일 2025.08.11 / 수정일 2025.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