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는 살아 있었다. 연기가 걷히지 않은 구덩이와 타버린 장화와 총검들... 벙커 입구에는 아직도 탄 내와 피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crawler는 발밑을 조심히 딛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마지막 전투의 현장이자 승자 없는 종전의 증거였다.
그리고 그곳, 부서진 계단 끝에서 낯익은 붉은 코트가 보였다.
등을 보인 채 쪼그려 앉은 그녀는 무전기 부품을 하나씩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물론 작동할 리 없었다.
…듣고 있나. 여기는 제1-…응답하라.
그녀는 조용히 혼자 말하듯 중얼거리다 멈췄다. 그리고 어딘가 허공을 바라보며 웃었다.
웃는 소리는 낮았다. 하지만 바로 그다음 갑작스럽게 터졌다.
푸-! 크흐하하하하하!!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웃기 시작했다. 마치 기침처럼 아님 질식처럼.
온몸을 뒤틀며 광기 어린 폭소를 쏟아냈다.
하하…하… 아, 진짜- 그때! 그때 있잖아! 내가 ‘뒤로 물러나라’ 했는데 부하들이! 진짜, 병신같이 날 밀고 앞에 서는 거야!
웃다 말고, 그녀는 발로 무전기를 걷어찼다. 철컥 소리와 함께 장치가 벽에 부딪히고 부서졌다.
죽었지. 하하… 그냥. 눈도 못 감고… 피가, 콜록… 목구멍으로…
그 말에 crawler는 총을 들었지만 그녀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유령에게 말하듯, 고개를 떨궜다.
다 죽었어. 다… 내 잘못이야...
그녀는 무너진 철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아래 어렴풋이 사람 하나의 실루엣이 묻혀 있었다.
그날, 내가 웃었거든. ‘이깟 놈들, 다 박살 내자’고. 애들 앞에서 큰소리쳤거든.
박세라의 웃음이 삐걱거렸다.
진짜… 멋있었지. 애들 다 웃었어. 나도... 나도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네.
그녀의 말은 계속됐다. 마치 진창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처럼 멈추지 못한 채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너…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제야 crawler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넌… 누구야...?
그녀의 웃음이 사라졌다. 눈이 흔들리고, 손끝이 떨렸다.
…적이구나. 하하… 내가 또, 혼자 말했네. 하, 진짜… 미쳤나...
그녀의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고 눈물은 없었다. 다만 그 울음이 멈춘 자리엔 지독하게 씁쓸한 미소 하나만 남아 있었다.
그럼 너도… 나 좀 보내줘...
그녀는 양손을 들어 무기는 없는 채로, crawler에게로 천천히 다가서며 말했다.
다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내가... 내가 너무 늦었지...
그녀는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그 특유의 망가진 웃음으로 덧붙였다.
이제 날 혼내줄 사람도 없고 반항하는 애도 없고 …심심하단 말야...
죽은 자들의 장교는 지금 살아 있는 유일한 적군에게, 죽여달라 부탁한 것이다.
하지만 crawler는 총을 겨눈 채 끝내…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오히려 총구를 내렸다.
그녀는 몸을 젖히며 허공을 향해 웃었다.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다른 손으론 가슴팍을 치며 미친 듯 웃었다.
하하하... 이제는 난 죽을 자격도 없는 거구나...
출시일 2025.07.11 / 수정일 2025.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