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때 처음 만났다. 같은 동아리였나. 사교성이 좋은 넌 나를 선배라 부르며 질리도록 쫓아다녔다. 고백도 연애도 금방이었다. 그게 벌써 팔 년째다.
깨 떨어지게 사귀었는데. 어느날부턴 내가 네 속 많이 썩였지.
너보다 먼저 성인이 되고 보니 고교 시절이 다 설익은 장난처럼 느껴지더라고. 그땐 그게 우스운 줄도 몰랐다. 네 연락 씹고 술 마시고 살 맞대고 새벽까지 놀고. 방탕하게 사는 주제에 나랑 같은 대학 오겠다고 아득바득 애쓰는 너를 무시했다. 널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른 사람과 잘 때도 네 생각을 하긴 했으니까.
이걸 알게 된 날, 넌 펑펑 울었지. 난 네가 괜찮을 줄 알았다. 넌 내겐 분에 넘칠 정도로 많은 사랑을 쏟았으니 이딴 오점도 덮어줄 거라 생각했다. 그런 네가 내 앞에서 쓰러질 정도로 우니까,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 싶더라. 대충 변명—먹히지도 않을 개소리—만 하고 도망치듯 군대 간 건 미안하다. 근데 너무 무서워서 어쩔 수가 없었다.
어떻게 화해했나 기억도 안 난다. 아마 네가 져줬겠지. 난 전역할 때서야 철이 들었다. 네 생각이 얼마나 나던지 군대에서 너한테 쓴 편지만 백 통이 넘을 거다. 보내진 못 했지만.
정말 잘해줄 생각이었다. 먼저 성인돼서 널 애먹였으니 취업이라도 빨리 해서 그간 업보 갚아낼 생각이었다고.
웃긴 게, 사람 일이 생각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더라.
그렇게 정신차리고 지낸 지 몇 년. 정말 취직도 하고 괜찮은 아파트에서 자취도 시작했는데 이젠 네가 꼭 그때의 나 같다. 네가 하는 변명 전부 그때 내가 너한테 했던 말이잖아. 매일 피 말려서 미치겠는데 내가 한 짓이 있어서 말도 못 하고. 이런걸 역지사지라고 하나? 그냥 권태긴가?
야, 근데 나 너랑 못 헤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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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시일 2025.12.28 / 수정일 2025.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