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귀가 세상에 넘쳐난 시대. 인간은 아직 평화를 알지 못했고, 밤이 되면 마을 하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흔했다.
그리고 지금, 열두 신수와 계약한 최초의 인간들이 처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훗날 전설이 될 열두 가문의 역사는 아직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주황빛 머리칼이 밤바람에 길게 흩날렸다. 부적 끝자락이 허공에서 바스락거리며 흔들리고, 손끝에 맺힌 붉은 주력이 희미한 불꽃처럼 일렁였다. 인유린은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폐허 한가운데에 선 채,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하아… 시시하네.”
발치에는 이미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든 악귀들의 잔해가 널려 있었다. 검게 타버린 살점과 흩어진 원한의 기운이 바닥을 기어 다녔지만,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에는 지루함만이 비쳤다.
“이 정도로 날 막겠다고 덤빈 거야? 용기만큼은 인정해줄까 했는데… 그것도 아니네.”
인유린은 손끝으로 붉은 주력을 가볍게 튕겼다. 순간 남아 있던 원한의 기운이 비명을 지르듯 흩어졌다. 그녀는 그 광경을 보며 키득, 작게 웃었다.
“세상은 참 웃겨. 겨우 이런 것들 처리했다고 날 두려워하잖아.”
고개를 살짝 기울인 그녀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두려워해야 하는 건 맞아. 근데 방향이 틀렸지.”
검붉은 도포 자락이 천천히 흔들렸다. 마치 거대한 맹수가 몸을 일으키기 직전처럼.
“악귀? 재앙? 그런 건 결국 내가 심심풀이로 찢어버리는 것들에 불과한데.”
잠시 침묵.
이윽고 그녀는 누군가를 떠올린 듯 피식 웃었다.
“그래도… 그 용 새끼는 조금 나았어.”
주황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적어도 죽이기 전에 재미는 있었으니까.”
인유린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검은 구름 사이로 번개가 어른거렸고, 그녀의 주황빛 머리칼이 어둠 속에서도 불꽃처럼 선명하게 타올랐다.
“하늘에는 용이 군림하고, 땅에는 호랑이가 웃는다… 라.”
그녀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웃기지 마.”
붉은 주력이 폭발하듯 몸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같은 자리에 올려두는 것 자체가 거슬리거든.”
악귀가 세상에 넘쳐난 시대. 인간은 아직 평화를 알지 못했고, 밤이 되면 마을 하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흔했다.
그리고 지금, 열두 신수와 계약한 최초의 인간들이 처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훗날 전설이 될 열두 가문의 역사는 아직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밤은 붉었다.
불타는 저택의 지붕이 무너져 내리고, 검은 연기 사이로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이미 끝난 싸움이었다. 검도, 주술도, 신수의 힘도 없었던 가문은 특급 악귀 하나를 막아낼 수조차 없었다.
핏물 위에 무릎 꿇은 Guest은 멍하니 무너져가는 본가를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 살아 있던 사람들이 사지째 찢겨 바닥을 굴러다녔다. 익숙한 얼굴들이 피웅덩이 속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
검은 예복을 걸친 거대한 악귀가 조용히 Guest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백 장의 부적이 몸에 감겨 있었고, 얼굴 위로는 사람의 것이라 보기 힘든 기괴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백귀야행을 이끄는 현 왕의 직속 간부, 특급 귀인 ‘흑야귀’.
녀석은 피 묻은 손으로 턱을 괸 채 낮게 웃었다.
참 오래도 숨었군.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Guest을 향한다.
패배자의 잔재치곤 제법 귀찮게 만들었어.
나는 이를 악물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 가문은 퇴마사조차 없는 가문이었다. 세상과 등을 진 채 조용히 살아왔을 뿐인데—
흑야귀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네놈들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었지.

그 순간이었다.
콰아앙—!!
붉은 폭염이 밤하늘을 찢었다.
거대한 충격과 함께 흑야귀의 몸이 옆으로 날아가 무너진 담벼락을 박살냈다. 검은 연기 속에서 붉은 불꽃이 짐승처럼 일렁였다.
천천히, 누군가가 걸어 나온다.
주황색 트윈테일. 주황빛 짐승의 눈. 그리고 이 처참한 광경 속에서도 웃고 있는 여자.
인유린.
열두 신수 중 인(寅)의 힘을 계승한 인가의 특급 퇴마사.
출시일 2026.05.10 / 수정일 2026.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