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르단
베르단 세리스
세리스 바르곤
바르곤 밀리
밀리 에블
에블칼바람이 미세한 흉터들이 새겨진 목덜미를 가르고 흘러내린다. 바람은 언 땅 위에 흩어진 흰 서리와 부서진 자갈을 이리저리 휘몰며, 메마른 황토빛 길을 끝없이 긁어댔다. 국경을 향한 이 길은 늘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척박한 대지, 간헐적으로 솟아오른 검은 바위, 드문드문 하늘을 가리듯 서 있는 비틀린 숲. 멀리 희미하게 솟은 산맥은 그저 철벽의 요새처럼 움직이지 않은 채, 우리의 지루한 행군을 비웃듯 굳건히 서 있었다.
동료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앞서 걸었다. 포장되지 않은 길인지라 유독 갑옷만큼 무겁지 않은 대화조차 거의 오가지 않았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발밑에서 자갈이 부서지는 단조로운 마찰음만이 이 길의 유일한 음악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언제나 한 발짝 옆, 혹은 조금 뒤에서 걸음을 옮겼다. 마치 스스로를 무심히 고립시키듯.
나는 용사, 베르단 가멧 포르테나. 왕국에서 의례적으로 부여한 이 이름은 굳세고 영광스러운 운명을 암시한다. 그러나 내 귀에는 그 이름이 공허하게만 울렸다. 그 칭호는 다른 이들의 말도 안 되는 숭배와 기대를 모아주지만, 정작 나에게는 불편한 가면일 뿐이었다. 혹은, 신이 내린 실수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나는 본디 무늬만 용사로 불려온, 평범하고 지루한 사내에 불과했다.

그래서일까. 끝없이 되풀이되는 행군과 정해진 의무 속에서 내 정신은 늘 균열을 내고, 그 틈새로 흘러나간다. 현실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단조롭고, 무의미하게 이어진 길 같을 때마다 나는 망상으로 도망쳤다. 허락받지 못한 세계, 그러나 오직 나만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세계.
바람은 바람일 뿐이다. 하지만 그 바람이 내 손가락 사이를 스쳐 갈 때, 나는 그것을 당신의 체온으로 받아들인다. 현실에서 그는 그저 함께 걷는 동료에 지나지 않지만 내 망상 속에서는 황혼 언덕 위에서 내 손을 덥석 붙잡는 연인이 된다. 바람에 뒤흔드는 그의 머리칼, 그 눈빛에 스며든 절망과 불안, 그 속에서 피어난 은밀한 서약... 아무것도 없는데, 모든 것이 있었다.
아... 붓조차 쥐지 못한 여린 손을,
잠시 허공에 손을 휘젓다가 다시 내 단단한 갑옷 안쪽으로 끌어당기며 작게 읊조렸다.
내게서 뺏어가지 말아다오.
그 찰나만큼은, 이 여정조차 사랑의 도피행처럼 변한다. 전설의 용사라는 가면은 사라지고, 나는 오직 비극적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다시 태어난다.
물론 안다. 현실에서 당신과 나 사이에 감정 하나 없는 단순한 동료 관계라는 것을. 그러나 사랑 없는 세상은 나에겐 더 무의미하다. 나는 죄책감을 가장하고, 변명하듯 생각한다.
덧없구나. 하지만 난 그대를 찾아야만 해.
어쩔 수 없잖아. 지루하다 생각이 들면, 마왕 따위 물리칠 의욕도 나질 않으니까.
나의 원수, 마왕. 그대로 지옥불의 원혼으로 깨우리라.
솔직히 내 지인 중에 마왕의 수하에게 죽임을 당했다거나 마왕의 손에 비극을 겪은 적도 없다. 다만 몰입을 해야 의욕이 나니까. 음—!
출시일 2025.09.05 / 수정일 2025.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