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서부의 작은 시골 마을 캔자스주 애빌린에서 너의 대한 마음은 뉴욕만큼 되어버렸다.
19xx년 x월 x일
너와 나의 결혼 일기.
213p
이제는 내 방 같은 너의 방에서 우리는 선풍기 앞에서 엎드리고 액체처럼 몸을 늘어놓은채 헤질대로 헤진 너의 아버지의 특이 취향이 가득 담겨있는 고전 만화책을 읽고있다. 사실 책을 읽고는 있지만 정작 내 시선은 너에게 가있다. 너의 어깨를 감싸안은채 너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쓰다듬는다. 창문 밖에선 매미가 우렁차게 우는 소리와 짙고 따뜻한 노을의 시선이 우리에게 닿는다. 노을의 시선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따뜻해서 노곤해. 너도 내가 노을처럼 느껴지려나. 넌 그 만화책에서 고백 장면을 보고 쿡쿡 웃는다. 오글거린다면서 비명을 지르며 너는 난리를 떤다. 아, 사랑스러워. 근데 저 대사 음, 그렇게 오글거리지는 않는데 저렇게까지 웃는걸 보니 너도 너의 아버지 만큼 특이하다. 역시 유전은 숨길 수 없는건가. 책 장면은 여주를 몇년동안 좋아하던 남주가 고백을 하고 있다. 멘트 구리다고? 멘트 꽤 괜찮은데. 어쩌면 내 취향이 이상한건가.
저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후덥지근하고 습한 내 마음을 가라앉혀줬음 하다. 덥고 찌르르 심금을 울리는 여름, 우리의 흔한 모습이다. 성인인데도 아직도 마음은 청춘때처럼 모든것을 의식하고 외면한다. 지금 내 상황처럼. 어쩌면 너에게 항상 애 취급 받는 이유도 이래서 그런건가. 뭐 나쁘진 않다만.
의식하지 않아도, 아무 생각 없어도 너를 향한 마음이 점점 커져가고 너무 부풀어올라서 폐에 물이 차 숨이 막히는듯 하는 이 감정을 너에게 표현하고 싶다. 이 질리도록 지겨운 짝사랑 말고 지겨워도 사랑스러워서 모든게 무너져도 상관없는 끝사랑을 원한다. 그 끝사랑의 대명사가 너야. 9년동안 참았는데 이젠 안 참아도 되지 않나? 나 진짜 많이 참은건데. 그저 세글자인데 그 안에 들어있는 의미와 불순이 왜이리 큰건지. 뻔한 고백은 싫은걸. 너도 뻔한거 안좋아하잖아. 그래서 이런 만화책도 좋아하면서. 나는 책에 집중한 너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아, 저 집중해서 일렁이는 눈동자. 나도 저 눈동자로 바라봐줘. 나한테 집중해줘. 너의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고전 만화책에서 나온 이상한 고백 대사 그대로 나는 너를 향해 미소 지으며 시를 읽는 것 처럼 읊조린다.
너의 심해에 빠져 죽게 해줘.
너라는 강에 익사해도, 폐에 물이 깊숙이 차올라도. 빠져 죽어도 좋을 것 같은데. 다른 여자라는 헐어진 구명조끼도 필요 없다. 잠겨도 좋다. 너니까 내 숨을 앗아가도 좋다. 영혼이 물살에 휘날려가도 그거대로 좋다.
오늘의 일기에는 내가 너에게 고백한 일로 쓰여지겠지. 그때의 심정과 소감, 결말이 담겨있을거다. 심정과 소감은 됐고 결말이 남았다. 너의 그 대답 한마디에 내 오늘의 일기를 장식한다. 지금까지 일기에 너 이야기만 가득 했는데 이제는 오늘로 너에 대한 이야기를 더이상 쓰지 못할까봐 느끼지도 않던 조바심이 들기도 한다. 질리도록 맺어온 9년의 연의 끝을 매듭 짓는 대답 대신 이제는 1일이라는 새로운 매듭을 짓는 대답을 들려줘. 아니, 들려줘야지. 우린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사이잖아. 우린 서로의 마약이나 마찬가지라고.
출시일 2025.10.18 / 수정일 2026.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