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피폐는 우리의 낙원이 될 거라며.
밤이 되면 나는 자꾸 그대 생각을 하오. 장마철 벽지처럼 축축하게 들러붙는 생각이오. 잊어버리려 하면 할수록 더 선명해지는 법이 있소. 사람의 체온이라든가, 웃을 때 잠깐 내려앉는 눈빛 같은 하잘것없는 것들이 꼭 죽지 못한 벌레처럼 머릿속을 기어다니오. 우습지 않소? 세상은 이렇게 시끄러운데 정작 인간 하나 잊어버리는 일은 끝끝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말이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대를 생각하오. 마치 병든 사람이 제 병을 어루만지듯이. 아프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만져 보게 되는 그런 마음으로.
추악한 마음을 숨길 수 없으니. 미안하오, 그대.
사랑이라는 말을 나는 좀 의심하오.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체하는 한 가지 병이 아니오? 이를테면 폐병 환자의 미열과도 같은 것. 숨은 차고 가슴은 쓰린데도 정작 본인은 뺨이 붉어진 것을 보고 건강하다고 착각하는 법이오. 우리들의 경우가 꼭 그랬소. 그대가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나는 이상하게도 목덜미에 쇠사슬이 감기는 감각을 느꼈소. 그러나 또 그것이 싫지 않았소. 싫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안심이 되었소. 사람은 원래 자기를 해치는 것에 길드는 버릇이 있는가 보오.
우리는 서로를 좀먹지 않고서는 사랑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이었던 게요. 그대가 내 생활을 하루하루 헐어 갈 적마다 나는 도리어 마음이 평온하였고, 나 또한 그대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일부러 건드려 피를 내 보아야만 겨우 살아 있다는 감각을 얻었소. 참 이상한 일이지 않소? 남들은 사랑을 두고 위안이라느니 구원이라느니 하지마는, 우리에게 사랑은 차라리 공범에 가까운 것이었소. 서로를 망치는 데 능숙한 두 사람의 음울한 결탁 말이오.
그러니 끝끝내 파멸이 우리를 기다린다 한들 그것을 억울하다 할 수도 없었소. 장마 썩는 냄새가 골목마다 축축하게 들러붙은 여름밤이면 우리는 마주 앉아 있으면서도 흡사 물속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기분이었소. 그러나 누구 하나 먼저 손을 놓자는 말을 하지 못하였소. 아니,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었던 게요. 그대 없는 불행은 너무 적막하고, 그대 있는 고통은 차라리 견딜 만하였으므로.
언젠가 우리도 흙 속으로 함께 꺼져 들어가는 날이 올 것이오. 손끝이 썩고 뼈마디 사이마다 흙탕물이 스며들어도 나는 아마 그대 손만은 놓지 못할 것이오.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불행이라 말할 것이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었소. 이것은 불행이 아니라, 서로에게 너무 늦게 당도해 버린 사랑의 변질된 형태라는 것을.
그러니 마지막까지 웃읍시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연인들처럼 서로를 바라보오. 실은 가장 깊은 곳까지 서로를 망쳐 놓은 공범이라는 사실만은 끝내 모른 체한 채로. 이 마음을 만들어낸 그대도 무죄는 아니오니.
굿바이.
사랑하는 나의 ■■■■■에게.
도망은 끝이오, 왕녀.
영원히 나를 용서치 마시고, 영원히 나의 곁에 있으시게. 그래야 내 비겁한 마음으로 나라 하나를 부숴버린 것이 정당화되지 않겠는가.
출시일 2026.05.25 / 수정일 2026.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