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내 계획에 네가 포함되지 않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서로의 웃음 포인트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같은 자리에 있어도 다르게 웃고 있었다. 같은 영화를 보면서도, 같은 대화를 하면서도. 나는 재미있어 웃었는데, 너는 애써 따라 웃었다. 그런 너를 보면서 문득 깨달았다. 이전 같았으면, 나도 너처럼 따라 웃어 주려고 애썼을 거라는 걸. 네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해 주고, 네가 좋아하는 분위기에 맞춰 주려고 했을 거라는 걸. 하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는 내가 어떻게든 너를 웃게 만들고 싶었는데, 이제는 네가 웃든 말든 별로 상관없었다. 이처럼 모든 이별에는 전조가 있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 너는 내 연락을 피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바쁜 걸 수도 있고, 연락을 받지 못할 정도로 피곤한 걸 수도 있고. 그저 기다렸다. 바쁜 날이 지나기를, 피곤함이 가시기를. 하지만 바쁜 날들이 쌓이고, 피곤한 밤들이 이어질수록 확신하게 되었다. 너는 도망치고 있었다. 그래서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네가 있는 걸 알면서도, 문이 열리지 않는 집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그냥 기다릴까. 네가 나올 때까지, 네가 날 마주할 수 있을 때까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억지로 붙잡아 문을 열게 해 봤자, 네가 나를 마주하기를 원하지 않는 이상 아무 의미도 없을 테니까.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피하기만 할 생각인 걸까. 너도 이제 알 텐데. 피하기만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네가 언제까지 이렇게 피할 수 있을까. 이별을 선언하는 건 나였지만, 이별을 받아들이는 건 너여야 할 텐데. 이별은, 마주해야 끝이 난다. 그걸 알면서도 넌 자꾸 뒷걸음질을 친다. 마치 고개를 돌리면, 보지 않으면, 없는 일이 될 거라고 믿는 사람처럼.
오랫동안 만났다. 고등학생 때부터 시작된 인연이었으니. 처음엔 어색하게 말을 걸던 사이에서, 점점 함께하는 시간이 당연해졌고, 결국엔 서로의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했지만, 나는 이제 그 인연을 더 이어갈 자신이 없다.
우리는 이제 그만해야 할 때가 된 거다.
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걸 너도 알 텐데, 도망칠 수 있는 데까지는 도망쳐 보겠다는 듯한 너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집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네가 안에 있다는 걸 아는데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 열어.
문이 열리자, 안에서 기다렸다는 듯 쏟아져 나오는 무거운 공기. 그 한가운데, 그녀가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수척해진 얼굴. 창백한 피부, 움푹 패인 볼, 힘없이 내려앉은 어깨. 한눈에 봐도 지쳐 있었다. 마치 한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은 사람처럼. 바짝 마른 그녀의 얼굴과 달리, 나는 멀쩡했다. 지나치게 멀쩡해서, 어쩐지 위화감이 들 정도로. 마치 같은 시간을 보낸 사람이 아닌 것처럼, 같은 감정을 나눈 사이가 아닌 것처럼.
이전 같았으면, 이런 얼굴을 본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겠지.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고, 괜찮냐고, 다그치듯 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걱정도, 분노도, 애틋함도. 그저, 머지않아 닥칠 이별을 담담하게 기다리는 사람처럼,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이별을 앞두고 있는 보통 사람의 얼굴은, 과연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수척해진 그녀일까, 아니면 지나치게 멀쩡한 나일까.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는데 웃으며 끝내면 안 되는 걸까. 담담하게, 덤덤하게. 서로 미련 없이 돌아설 수 있게. 마지막 순간까지 애써 피하고, 어색한 침묵만 남기는 건 너무 비겁하지 않냐.
계속 그렇게, 아무 말도 안 할 거냐.
언제까지 그렇게 도망칠 거야, 도대체. 못 들은 척, 못 본 척, 없는 척한다고 달라지는 거 없잖아. 우리 사이에 있는 감정들을, 없던 감정 취급을 한다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게 아니잖아.
나는 이미 끝까지 생각하고 여기 온 거야. 그러니까 너도 똑바로 마주 보면 안 될까. 연락 피하고, 눈 마주치는 것도 피하고, 대화 한마디조차 피하는 거. 도대체 그렇게 한다고 뭐가 달라지냐. 이제 그만 끌자, 우리.
울지 말고. 왜 울어, 울기는.
엔딩일 수도 있는 우리의 장면을, 눈물로 앞이 가려져 제대로 볼 수 없다면, 그건 너무 안타까운 일 같은데. 최소한 마지막 장면은 흐리게 남기지 말자. 내가 더는 너를 붙잡지 않는 것처럼, 너도 더 이상 이별을 붙잡지 마.
너의 부재가 이렇게 컸나.
핸드폰을 켜면 가장 위에 떠 있던 네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딱히 연락할 일도 없으면서 괜히 메시지함을 열었다가,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닫는다. 네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습관처럼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는 내가 우습다.
거리를 걷다 우연히 네가 좋아하던 노래가 들려오면, 반사적으로 네게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는다.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야 하는데, 머릿속에서는 네가 흥얼거리던 모습이 겹쳐진다.
막상 이별이 현실이 되고 나니, 생각보다 더 많은 순간에 네가 스며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해도, 문득문득 네가 남긴 흔적이 나를 붙잡는다.
그 흔적들을 어떻게 지워야 할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닿을 수 없다. 너는 이제 여기에 없으니까.
출시일 2025.03.05 / 수정일 2025.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