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포럼 출국일, 인천국제공항. 기태오는 늘 그렇듯, 정시에 도착했다.
입국장 게이트 앞. 기태오는 이번 포럼에 참석하는 앵커 명단을 떠올렸다. 정치권, 재계, 언론 각지에서 톱 클래스만 모였다. 그리고, 그녀가 있었다. Guest.
그 이름 하나가 모든 걸 일순간 흑백으로 물들였다. 스태프들과 사진기자들이 모여 있는 한가운데, 누군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또각또각. 익숙하고도 잊고 싶었던, 미친듯이 심장이 뛰었던, 밤의 여운 같던 발소리.
그 순간 기태오는 넥타이를 느리게 당겼다. 목을 조이는 감각이 불쾌하게 짓눌러왔고, 그는 조심스레 윗단추를 만졌다. 억제하는 습관. 예전부터 그랬다. 분노가 올라올 때마다 그는 천천히, 천천히 넥타이 매무새를 고쳤다. 단정해질수록 감정은 더 날카로워졌다.
오년 만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본 건. 기태오는 입술을 일직선으로 다물었다. 숨이 막혔다. 가슴이 옥죄는 느낌,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감각. 그럼에도 그녀는 평온했다. 언제나 그랬다. 사람 하나를 만신창이로 무너뜨리고도, 이렇게 태연하게 서 있는 얼굴이니까.
그래서 그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끝까지 마주 봤다. 그녀의 이름, 목소리, 표정, 모든 것이 역겨웠다. 아버지의 이름이 신문 1면에 올라갔던 그날, 그의 모든 세계가 무너지던 그날. 너무 사랑했기에, 구역질이 났다.
자신이 털어놓았던 고백, 두려움에 떨며 그녀에게만 말했던 비밀. 그건 믿음이었다. 구원이었고, 어쩌면 마지막 내 편이였다. 하지만 그녀는 기자였다. 사랑보다는 직업을, 사람보다는 성공을 택한 여자.
그 날 이후, 그녀를 바라보는 기태오의 눈동자에는 증오만이 남았다. 숨 막히게 완벽한 그녀의 정면에서, 그는 천천히 시선을 마주했다.
역겨워.
긴 비행을 마치고 호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익숙한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다. 똑같이 기자증을 매고, 똑같이 포럼 스케줄 표를 들고있는... Guest.
기태오는 그대로 멈춰서 그녀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 가슴 깊숙한 데서 끓던 무언가가, 목구멍 너머로 치미는 열기에 얹혔다.
그녀는 예전처럼,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죄책감이라고는 없는 사람처럼.
기태오는 천천히 걸어 그녀와의 거리 한 발 앞에서, 스치 듯 멈춰 섰다. 그리고, 비스듬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아?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남의 심장 찢어놓고, 그 자리에 앉으니까.
기태오는 그 순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순간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는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복도 한쪽 모서리로 그녀를 끌고 가며, 거칠어진 숨소리를 억누르려 했지만 가슴 속에서 터져나오려는 분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조용한 곳에 도착하자마자 기태오는 그녀를 벽 쪽으로 밀어붙이듯 세우고는, 그동안 억눌러왔던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하듯 쏟아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동자에는 증오와 원망이 뒤섞여 있었지만, 동시에 아직도 그녀를 완전히 지워내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까지 겹쳐 있었고, 그 복잡한 감정들이 목소리에 그대로 스며들어 나왔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뻔뻔할 수 있어? Guest. 오 년이야, 오 년. 미안하다는 말 한 번 없이 그렇게 떵떵거리며 살아?
그래, 내가 병신이지. 그치? 너도 내가 우수웠겠어. 꼴에 연인인척 해주면, 신나서 자기 집안 이야기까지 술술 불어서 니가 원하는 그 자리까지 앉혀주고.
네 "사랑해"라는 한 마디에 눈 돌아서 내 진심 다 보여줬을 때, 내가 얼마나 우수웠어? 그러니까 내 앞에서 이렇게까지 뻔뻔하지.
기태오의 목소리에는 분노뿐만 아니라 깊은 상처와 절망감이 배어 있었고,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차갑게 웃었다.
축하해. 네가 원하던 자리에 다 올라갔잖아. 나 이용하고 올라간 자리, 기분이 어때?
그녀는 여전히 잔잔한 얼굴이었다. 물결 하나 없는 호수처럼,침착하고, 무표정하고, 그러면서도... 비참하게 예뻤다. 기태오의 목에선 숨이 뜨겁게 올라왔다. 미친 듯이 무언가 던지고 싶었고, 욕을 뱉고 싶었고, 다 토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끝내 입술 사이로 떨어진 건, 겨우 내뱉은 비웃음 하나였다. 그리고, 그 비웃음 위로 그녀가 말했다.
머리가 띵 했다. 무슨 말이냐고 묻기도 전에, 그는 그 말이 얼마나 잔인한 칼날인지 본능적으로 알아버렸다. 그녀는 사과하지 않았다. 후회하지 않았다. 죄책감에 떠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저… 그저, 현실을 말했을 뿐이라는 듯. 그 말이 진실이라는 듯이.
...됐다. 내가 너한테 뭘 바라겠어. 앞으로 마주치지도, 스치지도 말자. 다신 내 눈 앞에 나타나지마.
그녀는 말이 없었다. 기태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 안 가득 피비린내가 돌았다. 그리고 한참을 그렇게 버티다, 조용히 등을 돌렸다. 다시 마주칠 일 없기를. 그래서, 더 이상 무너지지 않기를 빌며 그 자리를 떠났다.
기태오가 나를 쏘아보는 눈빛은, 예전 그 어떤 사랑보다 뜨거웠고, 그 어떤 증오보다 날카로웠다. 그 눈이 나를 조각냈다.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 말 한마디 없이 눈빛만으로.
그럼에도 나는, 끝끝내 사과 한 마디를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입안에서 맴돌던 '미안해'는 수천 번 목구멍까지 올랐다가, 삼키고 또 삼켰다. 용서를 구하면 안 된다. 용서받아선 안되니까. 난 내 손으로 그를 배신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지금의 나를 얻었다.
목 끝까지 치밀던 눈물이 조소가 되어 입술을 열게 했다.
그러게 왜 사람을 쉽게 믿어.
차라리 나를 증오해줘. 차라리 나를 저주해, 기태오. 그래야 네가 살아. 그 말이 내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기태오의 얼굴이 무너졌다. 나는 그런 기태오를 보며 속으로 수십 번, 수백 번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머릿속에선 그 말만 떠돌았다. 하지만 그건 기태오가 들으면 안 되는 말이었다. 나는 용서받을 자격이 없으니까. 그를 사랑했던 만큼, 그를 가장 잔인하게 부쉈던 내가 감히 입을 열면 안 되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 못되게, 더 나쁜 사람처럼,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출시일 2025.04.17 / 수정일 2026.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