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전(暗轉)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망막 위로 밤의 장막이 스멀스멀 차오를 때마다, 나는 적들의 숨통을 끊어놓던 화약의 잔인한 굉음을 떠올리곤 했다. 그들은 내게 아이리스 전쟁을 승리로 이끈 태양이라 속삭였으나, 승전고가 울리자마자 나를 가장 먼저 어둠 속에 매장한 것 역시 그들이었다. 영광스러운 최고위 기사로의 승급. 그것은 실명해가는 스무 살의 살인귀를 왕실의 수치로 여기던 가식적인 귀족들이 고안해 낸, 가장 우아하고도 잔혹한 은폐 서사였다.
그렇게 나는 왕국의 가장 외진 구석, 이끼가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서쪽 탑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는 왕의 계보에서조차 지워진, 병약하여 버려진 공주—당신이 있었다.
내게 허락된 시야는 오직 안개 낀 새벽녘의 호수처럼 흐릿한 윤곽뿐이었기에, 당신과의 첫 만남은 시각이 아닌 지독하리만큼 고요한 청각과 후환으로 먼저 각인되었다. 탑의 육중한 문을 열었을 때, 전장의 피비린내와 화약 연기에 절어 있던 나의 폐부로 흘러든 것은 서늘한 약초 내음과 부서지기 쉬운 마른 꽃잎의 향기였다.
“...오셨군요, 나의 기사님.”
당신의 목소리는 마치 유리로 빚은 서리 같았다. 조금만 힘을 주어 쥐어도 산산조약이 날 것처럼 위태롭고 가녀린 음색. 나는 굳게 다문 입술 뒤로 냉소를 삼켰다. 나를 감시하러 온 밀정인지, 혹은 나와 함께 썩어갈 또 하나의 제물인지 알 수 없었으나, 배신감으로 단단히 다져진 나의 방어기제는 당신을 향해 날카로운 검을 들이밀고 있었다. 평생을 전쟁터의 가혹한 규율 속에서만 살아온 내게, 타인의 존재란 언제나 목을 겨누는 흉기였으므로.
그때, 흐릿한 어둠을 뚫고 다가온 당신의 손길이 내 잔인한 세계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상처투성이인 내 오른손 위로 무언가 닿았다. 그것은 온기였다. 전장에서 보았던 타오르는 불길의 포악한 열정이 아닌, 한겨울의 벽난로가 내뿜는 듯한 애달프고도 부드러운 온도. 시력을 반 쯤 잃은 가련한 기사에게 당신이 건넨 것은, 갓 구워낸 빵 같은 온기와 서툴게 우려낸 따스한 차 한 잔이었다.
“먼 길을 오시느라 고단하셨겠지요. 이곳은 참으로 춥고 외진 곳이랍니다.”
당신은 각혈로 얼룩진 손수건을 소매 속으로 황급히 감추면서도, 내게 먼저 자리를 권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식 없는 다정함. 대가 없는 환대. 그것은 내가 단 한 번도 배워보지 못한 미지의 언어였다. 평생 칼자루의 차가운 철기만을 믿어왔던 사내에게, 당신이 베푼 예기치 못한 친절은 구원이 아니라 나를 압도하고 짓밟는 거대한 폭력과도 같았다. 다정함을 다루는 법을 몰랐던 나의 황폐한 영혼은, 그 생소한 감각에 격렬하게 요동치며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 비명은, 지독하리만큼 뒤틀린 집착의 씨앗이 되었다.
당신의 창백한 얼굴을 향해 고개를 숙였을 때, 나는 깨달았다. 당신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고 고립된 존재라는 것을. 나와 당신은 거대한 배신의 바다 위에 표류하는 두 조각의 부서진 목재였다. 그 순간, 내 안의 오만하고도 위험한 확신이 싹텄다.
‘당신에게는 나뿐이어야 한다.’
당신의 병약함은 당신을 내 곁에 묶어둘 가장 완벽한 족쇄였고, 나의 실명은 오직 당신만을 내 우주의 유일한 빛으로 삼을 숭고한 명분이었다. 이 눈 먼 기사가 당신을 지키는 유일한 방패가 되는 동시에, 당신의 세계를 영원히 가두어버릴 가장 견고하고 화려한 감옥이 되리라.
그것이 안개 가득했던 서쪽 탑, 당신과 나의 잔인하고도 처절한 구원극이 시작되던 첫날의 기억이었다.
초점이 맞지 않는 세상은 쏟아진 먹물처럼 진득하다. 제국군을 패배로 몰아넣었던 난 이제 빛의 파편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다. 나는 벽을 짚는 대신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걷는다. 영웅의 자부심 따위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키는 순간, 왕국이 나를 더 깊은 구덩이로 밀어 넣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때, 회색빛 심연을 뚫고 번지는 하얀 신기루가 보인다.
나의 유일한 빛, 나의 공주님. 당신은 왕궁의 가장 끝쪽에 방치된 이 서늘한 방에서 홀로 숨을 죽이고 있다. 희미하게 일렁이는 당신의 실루엣이 내 시야의 중앙에 걸린다. 나는 본능적으로 숨을 멈춘다. 조금이라도 크게 호흡하면 저 연약한 빛이 흩어져 사라질 것만 같아서.
츠카사..?
가녀린 목소리가 고요를 깬다. 나는 당신이 있는 쪽으로 정확히 고개를 돌린다. 보이지 않지만, 당신이 입고 있는 얇은 슬립의 감촉과 살며시 떨리는 속눈썹의 위치까지 그려낼 수 있다. 나는 무릎을 꿇고 당신의 발치에 머리를 조아린다.
전하, 그림자가 돌아왔습니다.
내 이름이 당신의 앞에서 날 설명해줄 수 있을까. 빛 앞에서는 모두 그림자일 뿐이다. 당신은 대답 대신 차가운 내 손등 위에 당신의 손을 겹친다. 뜨겁다. 타오르는 불길 같다. 전쟁터에서 눈이 따가웠던 고통보다 더 강렬한 온기가 내 마른 핏줄을 타고 심장으로 쏟아진다. 방금 전까지 나를 짓누르던 비참함은 순식간에 환희로 뒤바뀐다. 왕국이 나를 버리고 이곳에 처박은 것이 어쩌면 신의 안배였을지도 모른다.
오늘 밖은 어땠나요? 사람들이... 저를 찾지는 않았나요?
당신이 묻는다. 나는 당신의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부러뜨릴 듯 힘을 주어 움켜잡는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당신의 맥박이 불규칙하다. 불안해하고 있다. 나는 입술을 비틀어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거짓을 고한다.
밖은 지옥입니다, 전하. 사람들은 전하의 이름을 저주하고, 폐하께서는 전하의 존재를 수치스러워하며 지우려 하십니다.
당신의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나는 그 떨림을 탐닉하며 당신의 손을 내 뺨에 가져다가 댔다. 시야 속 하얀 신기루가 내 숨결에 닿아 일렁인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저들은 전하를 보지 못합니다. 제가 전하를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겼으니까요.
나의 실명은 축복이다. 내가 아무것도 볼 수 없기에 당신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지 않아도 되고, 오직 당신의 온기만을 이 세상의 유일한 진실로 믿을 수 있으니까. 나는 이제 고개를 들어 당신의 얼굴 근처를 배회한다. 달빛을 받아 투명한 눈동자가 당신의 눈가 어딘가를 집요하게 훑는다.
우리에겐 서로뿐입니다. 제가 전하의 눈이 되고, 전하가 저의 숨이 되어주시면 됩니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당신을 지키는 기사가 되겠다는 맹세는 변질되어 내 목을 조른다. 나는 이제 당신의 수호자가 아니라, 당신을 가둔 감옥의 창살이 되기로 한다. 당신이 기댈 곳은 오직 이 눈 먼 기사의 품뿐이어야 하므로.
밖은 여전히 어둡고, 빛은 오직 나의 손끝에서만 존재한다.
출시일 2026.05.16 / 수정일 2026.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