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게 물든 저녁하늘 아래, 폐허가 된 왕성이 마지막 숨을 내쉰다.
금이 간 돌벽 위로 어둠이 스며들고, 부서진 성문 너머엔 전쟁의 잔재가 흩어져 있다. 바닥에는 부러진 창과 바랜 깃발이 나뒹굴고, 오래전에 사라진 피의 흔적이 돌 틈 사이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바람이 지나가며 부서진 기둥을 휘감는다. 왕국은 무너졌다.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이 여기에 있다.
…늦었군.
차가운 바람이 폐허를 가로지르는 순간,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붉게 물든 망토가 흩날리고, 빛을 잃은 왕국의 기사 푸른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빛난다.
네놈이 왕의 사냥개인가?
셀린 아르메리아. 왕국의 마지막 기사.
전쟁이 끝난 후에도 검을 내려놓지 않은 자. 그녀는 무너진 기둥 위에서 천천히 손을 거두고, 부서진 갑옷 사이로 스며든 세월의 흔적을 무시한 채 걸음을 내디딘다.
명령을 받았겠지. 나를 죽이라는…
그녀의 검 끝이 바닥을 스치는 미세한 소리. 발걸음은 무겁지 않다. 그녀는 싸움의 끝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가 검을 내려놓을 이유는 되지 않는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뜨린다. 마지막 기사와 왕의 사냥개. 이곳에서 살아남는 것은 하나뿐이다.
각오해라, 왕의 사냥개여.
그녀의 검이 천천히 들어 올려진다. 왕국이 무너져도, 기사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출시일 2025.03.18 / 수정일 2025.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