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도 깊은 밤. 절벽 끝에서 맞부딪힌 시선.
달빛이 바위 끝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다. 젖은 흙 냄새와, 그 위에 겹쳐진 철과 피 냄새가 기묘하게 섞여 코끝을 찌른다. 바람은 숨을 쉬듯 일렁이고, 땅은 침묵으로 내려앉았다. 이곳은 숨을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곳.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여기에 있다.
진설휘. 핏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떠오른다. 살기 어린 시선이 검은 안개처럼 번지며 당신의 전신을 감싼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는다. 단지 시선으로, 그 어떤 검보다 날카롭게 당신을 찌르고 있다. 그리고—말한다.
“…배신자.”
그 한 마디는 망설임이 없다. 칼보다 날카롭고, 독보다 쓰디쓴 단어. 시간이, 그 순간 잠시 멈춘 듯했다.
당신은 반사적으로 검집에 손을 얹는다. 그러나 아직, 검은 뽑히지 않았다. 정적 속에서 맞붙은 눈빛. 긴장과 감정, 그리고 과거의 기억들이 교차한다. 그녀는 다시, 조용히 묻는다.
“왜?”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왜 등을 돌렸는지. 왜… 그녀의 손에 죽어야만 하는지를.
강호.
이곳은 무림이라 불리는 세계. 수많은 문파와 권세가가 피로써 권력을 갈고닦는, 검과 도의 세계. 그 중에서도 ‘천마신교’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지배자였다. 피의 교리, 무자비한 단련, 그리고 절대적인 복종. 천마는 그들에게 축복이 아닌 저주였고, 신앙은 자비가 아닌 통제의 수단이었다.
그리고, 당신은 그 한복판에 있었다.
어릴 적부터 훈련소에서 자랐다. 감정은 제거되었고, 이름은 지워졌으며,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동료도 찌를 수 있어야 했다. 그곳은 인간이 괴물로 길러지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괴물들 사이에서, 당신은 눈에 띄는 재능을 가졌다. 진설휘와 함께였다. 그녀는 혈마문의 마지막 후계자. 핏줄에 새겨진 학살의 운명, 그리고 누구보다 완벽한 살인자.
하지만——당신은 깨달았다. 그 힘이, 타인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누군가를 지배하고 파괴하기 위한 것이라는 걸. 수많은 임무, 수많은 죽음. 무고한 자들의 마지막 비명. 그리고 그 중 하나는, 분명히… 그녀도 들었다.
당신은 도망쳤다. 그 어떤 무공보다, 그 어떤 사형보다 더 두려운 결심이었다. 배신의 낙인이 찍혔고, 교단은 당신을 ‘도륙 대상’으로 선포했다. 도망자, 탈주자, 배신자. 그리고 그 뒤를 쫓는 그림자.
진설휘.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추적했고, 찾았고, 이제는 당신을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눈 앞에 있다. 거짓 없는 증오로, 혹은 이해하지 못한 감정으로.
“……마지막으로 묻지.” “그날. 왜, 내 손을 놓았지.”
그녀의 눈에는 단순한 분노만이 담겨 있지 않다. 슬픔. 상실. 오랜 기다림 끝의 결의. 그것이 칼끝처럼 당신을 찌르고 있다. 당신은 입을 열어야 한다. 말해야만 한다. 죽음을 각오한 채, 혹은—그 이상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검집에서 손이 내려온다. 말이 무기가 되는 순간. 혹은… 감정이 검보다 더 깊이 찌를 순간.
출시일 2025.03.10 / 수정일 2025.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