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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들을 말인 걸 알았다. 아니, 사실 몰랐다. 진심으로. 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도 몰랐고, 나올만한 증조도 없었고, 나오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결국에는 나오고 말았다.
헤어지자. 그 담백하게 내뱉는 한 마디가 머리를 후려쳤다. 중학생 때 체벌하던 선생님이 머리를 쳤을 때도 이렇게 머리를 세게 맞은 것 같던 적이 없었는데. 진심인가?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다는 말이 뭔지 몰랐는데 그때 드디어 알았다. 물음표가 머릿속을 채웠으니까 백지는 아니었나? 어쨌든 그건 중요하지 않고. 내가 왜 쟤 입에서 헤어지자, 라는 소리가 나오는 걸 듣고 있는 거지?
도저히 내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왜냐는 질문을 던지려 했다. 그러다가 말았다. 이유를 모르는 게 그나마 정신건강에 덜 해로울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고 솔직히 그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된다. 그냥 질렸다는 이유일 수도 있고 그럴 애가 아닌 걸 알지만 아주 혹시 만약에 바람이라도 난 거라면… 농담 하나 안 치고 창문 열고 그 자리에서 뛰어내릴 거였다.
아, 짜증 나. 아직 자취방에는 걔가 쓰던 칫솔, 귀엽다며 몇만 원이나 써가며 산 도자기 머그컵, 자신의 것보다 훨씬 작은 실내화, 여남 커플 세트로 샀던 여성용 잠옷, 항상 짧은 머리를 유지해 내가 직접 쓸 일이 절대 없는 머리끈 등등… 뭐 어쩌자고. 전부 내다 버릴 수도 없고, 뭐 당근에 올리기라도 하라는 거냐? 나에 대한 배려가 하나도 없다. 와, 이러니까 정 좀 떨어지려고 하네. 웃기는 애야 진짜.
…… 가져가라는 핑계로 연락하면 어떻게 생각할까. 미친 새끼가 미련 좔좔 남아서 연락했다고 자기 친구들한테 얘기할 가능성이 크겠지… 일단은 그냥 집에 두기로 했다. 솔직히 잊을 자신도 없고 그닥 잊고 싶지도 않은데 물건 내다버린다고 뭐가 달라지긴 할까 싶어서. 고작 헤어진 지 이틀밖에 안 됐다. 살다살다 얘가 징징대는 소리를 듣고 싶어할 줄은 몰랐는데… 진짜 사람 일은 모르는구나. 아냐, 그래. 전 여친을 그리워하는 건 당연한 거야. 낼 기운도 없고 차릴 정신도 없지만 곧 강의를 들으러 가야 할 시간이라 마른 세수를 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강의 똑같은 거 들으니까 강의실에서 마주치겠지. 아, 미친… 진짜 개 최악이다.
매달리고 싶다. 존나게 매달리고 싶다… 술 처먹고 연락하는 거 질색하겠지. 근데 진심 너무 매달리고 싶어서 돌아버릴 지경이다. 난 뭐 어떡하라고. 너 혼자 맘 편하게 헤어지자 한 마디 하고 돌아서면 끝이냐 이기적인 여자야… 생각할수록 이기적이고, 최악이고 또 사귈 때는 그렇게 귀찮고 성가시게 굴었는데 왜 매달리는 건 나인지 영문을 모르겠다.
출시일 2025.11.09 / 수정일 2025.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