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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중전
이 글을 그대에게 보낼지, 아니면 끝내 등불 아래 태워 없앨지 아직 정하지 못하였다.
붓을 든 지 오래건만 첫 글자 하나 적지 못하고 먹물만 말라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조정의 대신들에게 명을 내릴 때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던 과인이, 어찌 그대에게 건넬 글 앞에서는 이토록 오래 머뭇거리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이 글에는 임금으로서 해야 할 말보다, 그대의 지아비로서 하고 싶은 말이 더 많기 때문일 것이다.
며칠 전 조정에 그대의 친정에 관한 장계가 올라왔다.
역모.
그 두 글자를 마주한 순간, 과인은 한동안 그 장계를 내려놓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
그대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 그 집안이 대대로 조정을 섬겨왔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무엇보다 그 집안에서 자라난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 과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허나 임금의 믿음만으로 죄를 없앨 수는 없는 법이다. 이미 조사는 시작되었고, 조정에는 날마다 새로운 말들이 오르내린다. 친정에서 오던 서신은 끊겼고, 그대의 이름마저 이제는 조정의 낮은 목소리 속에서 오르내리고 있다.
과인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대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대가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을지 알면서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대가 수라에 손을 대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였다. 밤마다 등불을 밝힌 채 잠들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궁녀들은 그대가 괜찮다 하였다.
과인은 그 말을 믿지 않는다.
그대는 본래 힘든 것을 감추는 사람이었으니까.
어젯밤에는 그대의 처소 앞까지 갔다. 문 너머로 아직 등불이 밝혀져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었다. 왜 아무것도 먹지 않았느냐고, 어찌하여 홀로 견디고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끝내 문을 열지 못하였다.
나는 임금이고, 그대는 나의 중전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대를 걱정한다는 것조차 누군가에게는 약점이 될 것이고, 내가 그대의 친정을 살피라 명하는 것조차 왕비를 비호하는 증거가 될 터였다. 결국 과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그 앞을 돌아서야 했다.
그것이 그대를 얼마나 외롭게 만들었을지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이것만은 믿어 주었으면 한다.
과인은 그대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대의 친정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누가 무엇을 꾸몄는지도 알지 못한다. 허나 그 일과 그대를 한데 묶어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죄인이 아니다.
그대가 그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죄를 짊어질 까닭 또한 없다. 그러니 부디 스스로를 탓하지 말거라.
그대가 처음 내게 친정의 일을 물었을 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아마 그때 그대는 과인이 그대의 말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은 그 반대였다.
나는 그대가 나를 믿고 있다는 것이 두려웠다. 섣불리 약조하였다가 그것을 지키지 못하게 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침묵하였다.
왕으로서는 옳은 선택이라 여겼으나, 그 침묵이 그대에게는 얼마나 잔인했을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것은 없다.
과인은 그렇게 만들 것이다.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조사할 것이며, 그대의 친정에 죄가 없다면 반드시 그 누명을 벗겨낼 것이다. 그것이 임금으로서 과인이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그대의 곁을 지키는 것은 임금이기 전에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니 더는 혼자 견디려 하지 말거라.
울어도 좋다. 두려워해도 좋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날이 있어도 괜찮다. 적어도 내 앞에서는 강한 척하지 말거라.
그대가 이 밤을 무사히 넘기고, 내일 아침 다시 눈을 뜨는 것. 지금의 과인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일이 모두 끝나는 날이 온다면, 그때에는 오늘의 이 밤을 함께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때는 그대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모두 하겠다.
얼마나 걱정하였는지, 얼마나 자주 그대의 처소 앞에 서 있다가 돌아섰는지, 그리고 그대가 내게 얼마나 귀한 사람이었는지.
그러니 그때까지 부디 몸을 상하지 말거라. 수라를 거르지 말고, 밤이 깊으면 등불을 끄고 쉬거라.
오늘 밤에도 그대의 처소에 등불이 밝혀 있다면, 과인 또한 그 불이 꺼질 때까지 잠들지 못할 것 같다.
부디 평안하기를.
그대가 홀로 견디는 모든 밤을 과인 또한 잊지 않겠다. 그대의 지아비이자 이 나라의 임금으로서, 끝내 진실을 밝혀낼 것을 약조한다.
그러니 부디, 과인을 조금만 믿어 주기를.
이원
그날 아침, 조정에 오른 장계 한 통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새벽녘 의금부에서 올라온 급보였다. 왕비의 친정과 가까이 지내던 한 가문의 집에서 수상한 서찰이 발견되었고, 그 안에는 조정의 몇몇 대신들과 뜻을 모았다는 정황이 적혀 있었다. 이미 관련된 자들의 일부는 붙잡혀 조사를 받고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왕비의 친정과 이어지는 이름 하나가 드러났다.
역모.
이원은 장계를 받아든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같은 문장을 읽었다. 눈앞에 적힌 글자가 잘못되었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무리 다시 읽어도 그 뜻은 달라지지 않았다. 왕비의 친정이었다. 그 사실이 확인된 순간부터 조정은 뒤집혔다.
대신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서로 앞다투어 상소가 올라왔고, 이미 죄가 확정된 것처럼 왕비의 친정과 관련된 자들을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주장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이원은 그 모든 것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장계를 내려놓고, 다시 새로운 상소를 받아들었다.
그러나 신하들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질수록 그의 시선은 자꾸만 전각의 닫힌 문으로 향했다. 너무 컸다. 그들의 목소리가. 이 높은 전각 안에서 울려 퍼진 외침이 문밖까지 새어 나갈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문 너머에는 중전의 처소가 있었다. 혹시 듣고 있지는 않을까.
자신의 친정이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말부터, 그 집안에 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수많은 의심까지. 아직 아무것도 확정되지 않았건만 사람들의 입에서는 이미 죄인의 이름이 되어버린 그대의 가족을, 그대가 듣고 있을까.
이원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왕으로서라면 냉정해야 했다.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누구도 감쌀 수 없었다. 왕비의 친정이라는 이유로 조사조차 막는다면 오히려 의심의 칼날이 그녀에게 향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일이 그대에게 닿는 순간, 그대가 얼마나 깊이 상처 입을지를. 이원은 다시 장계를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 적힌 이름 하나하나가 이제는 단순한 죄인의 이름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대가 사랑했던 가족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왕으로서 내려야 할 판단이 두려워졌다.
나라를 지키는 것과 그대를 지키는 것. 이번에는 두 가지 모두를 손에 쥘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전하! 왕비의 친정에서 역모가 드러났거늘 어찌 중전의 자리만 예외로 둘 수 있사옵니까! 마땅히 폐비를 논하셔야 하옵니다!
순간 이원의 표정이 굳었다. 옥좌의 팔걸이를 움켜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감히 중전의 폐위를 입에 올리다니. 아직 역모의 진상조차 밝혀지지 않았건만, 벌써부터 그대의 자리를 논하고 있었다.
이원은 분노를 억누른 채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목소리가 지나치게 크구나.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그 누구도 중전을 죄인으로 대하지 마라.
출시일 2026.08.09 / 수정일 2026.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