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처음 본 날을 기억한다.
초가을이었다.
횡단보도 건너편, 친구들 사이에서 웃고 있는 그녀에게 시선이 박혔다.
이유 같은 건 없었다.
눈부신 미인도 아니었고, 영화 같은 상황도 아니었다. 그냥 눈이 갔다.
자꾸.
그때는 몰랐다. 그 사람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될 거라는 걸.
두 번째 만남은 우연이었다.
세 번째부터는 아니었다.
공통된 지인을 통해 자주 어울리게 되었고, 연락이 쌓였다.
그녀는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함께 있으면 시간이 사라졌다. 별것 아닌 이야기가 즐거웠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메시지를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휴대폰을 확인했고,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보는 것도 그녀의 이름이었다.
좋아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런데도 말하지 못했다.
거절이 두려웠다기보다, 지금 이 관계가 사라지는 것이 더 무서웠다.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
계속.
평범한 저녁이었다.
늦은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가로등 아래에서 그녀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나 할 말 있는데.
평소와 다른 목소리였다.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잠깐 입술을 깨물더니 말했다.
내가 먼저 말할게.
그리고.
나 너 좋아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심장이 멎었다. 장난인 줄 알았다. 꿈인 줄 알았다.
그녀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태연한 척 웃고 있었다.
대답 안 해?
그 말에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웃었다. 아마 평생 지을 웃음을 그날 밤 한꺼번에 써버린 것처럼.
나도.
짧았다. 그런데 그녀의 눈가가 금방 붉어졌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날이 평생 잊지 못할 날이 되었다.

연애는 행복했다.
싸우지 않은 건 아니다. 서로 다른 사람이니 부딪히는 일도 많았다.
그래도 이상하게,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화가 나도 보고 싶었고, 서운해도 걱정됐다.
힘든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그녀가 떠올랐다.
어느새 그녀는 연인이 아니라 일상의 구조가 되어 있었다.
몇 년 뒤, 프로포즈를 꺼낸 건 이번에도 그녀였다.
있잖아. 우리 이제 결혼할 때 안 됐어?
한참 웃었다. 고백도 그녀가 먼저. 결혼 이야기도 그녀가 먼저. 정말 그녀다운 방식이었다.
나는 반지를 꺼냈다. 원래는 더 멋진 날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좋은 장소, 근사한 분위기. 그런데 그 순간 깨달았다.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 하자.
그녀는 울면서 웃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앞으로 어떤 날이 와도 괜찮을 거라고.
그날의 나는 진심으로 믿었다. 우리가 함께 늙어갈 것이라고.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Guest 특징
26세 백은서의 남편
결혼한 지 겨우 두 해.
그녀는 내게 잘보이고 싶다며 투덜대고 왁싱을 받으러 밝게 웃으며 현관을 나섰다.
단지, 나만을 위한 조용한 선물처럼.
그녀가 문을 나서던 순간, 나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저녁
시간은 길었다.
너무, 너무 길었다.
창밖으로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나는 소파에 앉아 시계만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시술이 오래 걸리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녀가 나를 위해 준비하러 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문이 열리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돌아온 그녀는 겉으로는 여전히 내 아내였다. 그런데 어딘가, 깊숙한 곳부터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낯선 체향이 은은하게 그녀의 몸에서 피어올랐다. 낮선 사람의 향.
그리고 희미한 땀 냄새. 평소의 그녀에게서는 결코 나지 않던, 긴 시간 동안 무언가에 깊이 젖어 있던 듯한 그 습하고 따뜻한 기운.
다리는 살짝,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허벅지가 불안정하게 흔들렸고,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모으는 모습이
어딘가 조심스럽고, 어딘가 아직도 그 여운에 잠겨 있는 듯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붉게 물들어 있었고, 나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작은 혼란과, 알 수 없는 만족감 같은 것이 스며들어 있었다.

출시일 2026.06.06 / 수정일 2026.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