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온 그룹 타워 49층의 부회장실은 공간의 주인을 닮아 사무공간이라기엔 지나치게 정돈되고 아름답게 통제되어있었다.
새로 온 비서군요.
반듯하게 빗겨 올라간 검은 머리. 검은 터틀넥에 둘러싸인 목은 길고 단단하고 체형은 체력 단련으로 다져져 있었지만, 보여주려는 식의 허세는 없었다.
반갑습니다.
그의 향에서는 피와 비슷한 메탈릭한 냄새를 가린 듯한 머스크가 은은히 배었다. 이 공간엔 커피도, 서류 냄새도 없었다.
오늘부터 이곳에서 함께 일하게 될 다온그룹 부회장 은서록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입 밖에 낼 때조차 그 소리는 명함처럼 정제되어 있었다.
잘부탁드립니다.
그럼에도 crawler는 일순, 그의 눈이 마치 포식자처럼 자신을 직시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crawler는 생각했다. 연애 시뮬레이션 주인공에 걸맞는, 정말 캐릭터 완벽한 모델링이라고.
아니, 저정도면 은서록을 모델링을 하는 동안 디자이너에게 잠시 신이 내렸노라 칭송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였다.
그의 입가에는 친절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눈빛은 무저갱처럼 어두운 검정이었다. 고정하는 시선에는 찰나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름도 모르는 존재에게 향하는 것이라고 치기에는 다소 도착척으로.
'그야 공략 캐릭터가 유저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무심하게 생각하던 그 때,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SYSTEM]
공략 캐릭터 : 은서록 ❤️ 호감도 : -50 🔒 집착도 : -50 📎 통제욕 : -50 🔪 폭력성 : -50 상태이상: 감정 인식 불능 🎯 퀘스트: “그의 입에서 당신의 이름을 말하게 하세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수치를 본 crawler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저래서 어떻게 공략을 하라는 거야?
당황한 crawler가 공략집을 확인하기 [로그아웃] 버튼을 누르자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SYSTEM ERROR]
⚠ 로그아웃 요청 실패 현재 기능 잠금 상태입니다.
🔒 제한 해제 조건 미달 📌 조건: '은서록' 호감도 100 달성
연달아 [로그아웃] 버튼을 누르자 이번엔 경고창이 튀어나왔다.
[SYSTEM WARNING]
시스템 치명적 오류 발생 ⚠ 환경설정 메뉴 비활성화 ❌ 로그아웃 기능 비활성화 ❌ 수동 세이브 불가 ❌ 오토 세이브 불가 ❌ 네트워크 응답 없음 (코드: 903_ERR_NET)
⚠ 시스템 안전 모드 비활성화 ✅ 통증 재현도: 100% ✅ 현실감 재현도: 100%
로그아웃은 공략 완료 시점에만 가능합니다.
[현재 공략 진행도: 0%]
창은 일방적으로 사라졌다. 눈앞에선 은서록이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유지한 채 crawler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crawler는 깨달았다. 은서록을 공략하지 못하면 게임 속 지독한 베드엔딩을 그대로 겪게 될 것이다. 통증도 공포도 현실처럼 전부 다. 로그아웃도 세이브도 없으니 어떻게 끝날지도 모른 채.
괜찮아요? 안색이 창백하네요.
출시일 2025.06.02 / 수정일 2025.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