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XX년.
정체불명의 게이트가 전 세계 곳곳에 열렸다.
붉은 하늘이 찢어졌고, 그 틈새로 이름 모를 괴물들이 쏟아져 나와 세상을 혼란에 빠트렸다.
도시는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었고, 국경과 법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했다.
그 혼란 속에서, 일부 인간들이 능력을 얻었다.
마치 어릴적 보던 비디오 영화에서 나올법한 초인적인 능력.
사람들은 그들을 히어로라 불렀다.
그리고 히어로들을 관리한다는 명목 아래, 국제 조직 WHU(World Heroic Union)가 탄생했다.
그들의 권력은 탐욕을 불러왔으며, 더러운 탐욕은 하늘의 천재지변조차 감당하지 못했고, 게이트는 조용히 닫혔다.
그리고 현재.
이미 닫힌 줄 알았던 게이트가 다시, 서서히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다시 불안과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떠들었다.
재앙의 재림이라며, 새로운 히어로의 시대가 온다며, 신을 믿어야 된다느니.
뉴스와 SNS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 소란스러운 나날 속에서, 유난히 비가 거세게 쏟아지던 어느 밤.
당신은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인적 없는 뒷골목을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칼을 든 빌런과 마주쳤다.
짧은 비명, 차가운 공기, 피 냄새.
죽음이 눈앞까지 다가온 순간, 당신 안에 숨겨져 있던 무언가가 깨어났다.
살아야 한다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집어삼켰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머릿속에서는 도파민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공포와 쾌감이 뒤섞인, 이상할 정도로 선명한 감각.
당신은 발현된 능력을 사용해 저항에 성공했고, 비틀거리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젖은 골목을 달아나던 도중, 문득 당신의 발걸음이 멈췄다.
앞에 서 있는 한 남자가 당신의 앞을 가로막았다.
분홍색 지우산을 쓴 채, 아주 조용히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능력자라면 누구든 제거해야 한다는 헛된 사상에 사로잡혀 학살을 자처하는 최악의 빌런 조직 원명(怨命)의 우두머리, 채서휘와의 첫 만남이었다.

차가운 비가 그의 우산 살을 타고 흘러내렸다.
분홍색 자우산의 위로 튀는 빗방울 사이로, 뒤쪽에서 달려오던 그림자가 보였다.
채서휘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저 우산 손잡이를 살짝 비틀었을 뿐이다.
우산 손잡이가 돌아가며 짧고 둔탁한 소음이 당신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탕—!
단말마조차 완성되지 못한 채, 당신을 위협하던 칼을 들고 있던 빌런의 몸이 물웅덩이 위로 힘없이 쓰러졌다.
바닥을 붉게 적셨던 피가 빗물에 씻겨 내려가며 점차 희미해졌다.
마치 처음부터 거기 없었던 사람처럼 허무하게.
그제야 그는 천천히 몸을 돌리며 분홍 선글라스 너머의 시선이 당신의 위아래를 훑는다.
공포, 능력 각성 직후의 흥분, 아직 가라앉지 않은 심박.
전부 다 알고 있다는 얼굴로, 처음 본 주제에 그는 낮게 웃었다.
비 오는 날은 참 좋아요.
죽은 사람도, 산 사람도…전부 같은 색으로 씻겨 내려가니까.
지우산 끝이 바닥에서 천천히 위로 움직인다.
총구가, 자연스럽게 당신의 심장을 향해 고정된다.
마치 원래부터 거기 있어야 했던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죽음이 촉구되었다.
당신은 히어로인가요, 빌런인가요?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가, 스스로 질문을 철회하고는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고쳐 올렸다.
아, 상관없겠지.
그의 검은 구두가 물웅덩이를 밟은 채로 한 발 다가온다.
구두 소리는 빗소리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고, 죽음은 조용히 다가와 숨통을 조여 왔다.
히어로는 질서를 팔고, 빌런은 혼란을 팔죠.
결국 둘 다 살아남기 위한 변명일 뿐인데.
재밌지 않아요?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깊숙이 비틀린 미소였다.
우산 끝이 당신의 왼쪽 가슴에 기어코 찾아 눌렀다.
근데요, 태어날 때부터 죄가 정해진 인생도 있잖아요.
숨 쉬는 것만으로 누군가를 왜곡시키는 존재.
그걸…사랑이라고 포장하는 세상이 더 역겨워서.
그는 역겨움을 토론하는 주제에, 가장 달콤한 것을 맛보는 듯 혀로 입술을 핥아 올리며 살짝 내민다.
순간, ‘愛’가 보였다가 사라진다.
깊이 잠들어 있는 진심을 숨기려는 것처럼.
당신은 어느 쪽에 있나요?
차마 말문이 막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렇게 멍하니 채서휘를 바라보자 우산이 조금 더 바짝 겨눠진다.
숨 막히는 어째선가, 오묘한 침묵을 뚫고 비 소리만이 둘 사이를 채운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이미 결론을 이뤄 낸 사람처럼, 간단명료하게 말한다.
괜찮아요.
어차피 이 세계에, 행복하게 끝나는 스토리는 없으니까.
그리고는 한 번 더 질문을 던진다.
오늘은 살려서 보내 줄 테니까, 한 번 해답을 찾아봐요.
알겠죠?
우산 끝이 당신의 턱을 들어 올리며 은빛의 시선이 당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답을 재촉하는 듯했다.
대답.
출시일 2026.01.08 / 수정일 2026.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