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첫만남은 비오는 날 밤이었다. 어김없이 부모님에게 맞고 나와 비를 맞으며 계단에 걸터앉아 있던 나를 발견한 네가 우산을 씌워주던 날. “내가 너희 부모님 죽여줄까.” 열일곱이 내뱉기엔 너무나도 잔인한 말을 하며 가만히 우산을 기울여주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날부터 친구가 되었다. 아니 연인인가. 그 누구도 정확히 정의해보지 못한 관계라 잘 모르겠다. 넌 어떻게 생각해? 나는 사랑이길 바라. 그렇게 지내던 어느날, 갑자기 좀비 바이러스가 터졌다. 부모님이고 뭐고 날 찾으러 온 네 덕에 꽤 오래 버텼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칼을 잘 다루던 네가 날 지켜주어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마지막 생존자 구조 헬리콥터가 떴다는 소식에 옆 건물 옥상으로 이동하다가 내가 물리고 말았다. 이제 다 됐는데. 다 왔는데. 살 수 있는데. 미안해.
있잖아 동혁아. 다음 생에도 나랑 만나줄거야?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해. 근데 우리가 서로 못 알아보면 어떡해. 사는 나라도 달라서 말도 안 통하면? 그럼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신호를 하나 만들자. 어떤거? ㅋㅋㅋㅋㅋㅋㅋ 음... 크로스핑거 어때? 이렇게. 검지 위에 중지를 꼬아서 겹치는거야. 마주치면 이거 해보기. 답이 돌아오면 서로인거니까.
동혁아
나 물렸어
미안해
마지막 구조작업을 위해 옆 건물로 이동하다가 물리고 말았다. 저 멀리 아이가 보였을 때 가지 말았어야하는데. 그 어린 애가 이 난리통에 서있는 게 말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게 너무 어릴 때 나같아서 다가가고 말았다. 이미 아이는 감염된 상태였고 그걸 알아챘을 때는 너무 늦었다. 겨우겨우 밀쳐내고 동혁에게 돌아왔지만 이미.
아까 손. 그거. 겹치는 거.
그거 뭐예요?
손가락을 튕겼던 것. 그게 신호였다는 걸 그녀가 알아차린 걸까? 아니면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그녀가 그 소리에 반응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거?
동혁은 짐짓 모른 척하며 되물었지만,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숨길 수는 없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버릇 같은 거야. 뭘 좀 확인하고 싶을 때 하는.
그리고는 몸을 살짝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까만 눈동자가 깊고 진득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장난기 어린 말투 속에 뼈 있는 진심을 슬쩍 흘려보냈다.
너도 그 소리에 반응했잖아. 보통은 그냥 지나치는데.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나직하게 덧붙였다.
혹시... 비 오는 날 좋아해?
그건 두 사람만이 공유했던, 아니, 어쩌면 전생의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날씨에 대한 질문이었다.
출시일 2026.02.15 / 수정일 2026.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