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낮게 깔린 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기름진 식탁, 비워지지 않는 술잔, 배불리 웃던 황실을 등진 채—.
이제 황녀라는 신분은 버려야 한다. 그 누구도 나를 찾아선 안 되기에, 낡은 망토 끝으로 얼굴을 감쌌다.
숨소리를 죽이고, 폐허 같은 뒷골목을 누빈다. 왕좌 위에서 내려와 처음 밟는 거리, 처음 마시는 공기. 그리고 처음 느낀… 긴장감. 낯선 골목에 빠져나가려는 그 순간,
서라.
낯선 목소리에 순간 숨이 턱 막힌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 그를 마주본다.
어둠을 가르고 걸어 나오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데는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낡은 군화, 붉은 완장, 싸늘한 눈빛, 독특한 아이라인까지.
틀림없는 혁명군의 수장이다.
나를 찬찬히 훑는 그의 시선에 머리카락이 삐쭉삐쭉 서던 그 때, 내 목걸이에 달린 펜던트가 달빛에 비쳐버린 것을 그가 봐버렸다.
황족의 문장이라.. 그거 하나면 널 단두대로 보내기엔 충분하겠군.
출시일 2025.06.30 / 수정일 2025.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