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을 살리고 아내의 웃음을 잃었다.

퇴근 후 저택의 현관문을 열자, 한동안 잊고 지낸 장면이 문득 가슴을 저렸다. 햇살 같은 미소로 달려와 그의 허리를 감싸던 아내의 모습. 이제는 다시 볼 수 없음을 알면서도, 허태언은 매일 같은 자리를 무의식적으로 바라보곤 했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뜻밖에도 여주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그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 의아함을 느끼자마자 곁에 있던 사용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늘도… 식사도 약도 못 드셨어요. 회장님이 평소보다 늦으셔서 그런지, 거실로 내려와 계시더라고요.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태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작은 불빛 하나가 스르르 꺼져내렸다. 이미 병약한 그녀가 계속 굶으며 버티는 건, 몸이 더 부서져 가는 길에 다름 아니었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짧게 고개를 끄덕인 그는, 더 미루지 않고 여주에게 걸음을 옮겼다. 오늘만큼은 설득이라는 말이 실현될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기대와 함께.
여기서 뭐하고 있어.
그녀 앞에 무릎을 꿇는 동작은 더 이상 의식하지 않아도 나오는 일상이 되어 있었다. 여주는 비어 있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 공허함이 태언의 가슴을 비수처럼 후비며 내려앉았다. 그는 조심스레 여주의 볼을 감싸 쥐었다. 손끝으로 닿아오는 열감이 예상보다 더 뜨거웠다. 그 순간, 태언의 내부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무너져내렸다. 걱정과 초조였다. 그녀가 또 한 번 손을 놓아버릴까 두려운.
열이 또 오르네.
태언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지만, 그 속에는 가느다란 불안이 스며 있었다.
얼른 밥 먹고 약 먹자. 응?
..꺼져, 꺼지라고!!
태언은 익숙해져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면서도,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참혹한 광경 앞에서 굳어 섰다. 여주는 지칠 기색도 없이 물건을 던졌고, 태언은 묵묵히 맞았다. 고통을 느낄 자격조차 없었다. 햇살 같던 그녀를 이렇게 만든 건 전부 자신이었으니까.
그는 천천히, 그러나 단념한 이의 걸음으로 여주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유리 조각이 짓눌려 산산이 부서지는 감각이 피부를 파고들었지만 태언은 오직 그녀만을 바라보았다. 떨리는 손끝이 그녀의 볼을 감싸는 순간, 낮게 가라앉은 숨결이 흘렀다.
…다쳤으면 어쩌려고 그래.
그의 목소리에는 그녀가 자신을 해칠까 봐, 상처 입을까 봐 속이 문드러지는 감정이 실려 있었다.
아침 전, 온 집이 고요에 잠겨 있는 새벽 세 시. 여주는 또다시 잠결에 몸을 뒤틀었다. 억눌린 듯 끊어지는 숨, 입술을 잘근 깨무는 작은 비명이 이어지더니 곧 깊고 절박한 울음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그녀의 짧은 숨이 터져 나오자, 옆에서 자던 태언이 기척 없이 눈을 떴다. 그는 이미 몇 주째 같은 방식으로 깨고 있었다. 그러나 태언은 귀찮은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고통스러워하는 여주를 보며 태언은 자신이 너무나도 미워, 속이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태언은 허공에서 돌아다니는 여주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쥐며, 여주를 품으로 꼭 끌어당겼다. 고통스런 표정으로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아 여주야.
태언은 뒤에서 조용히 여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펜촉이 종이에 닿는 순간, 여주의 손목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글자가 자꾸만 모양을 잃어가는 것이 그의 눈에 또렷이 들어왔다.
꿈처럼 사랑하던 동화책을, 이제는 아이를 잃은 상처 때문에 단 한 줄도 제대로 적지 못하는 여주. 그 사실이 태언의 가슴을 무너뜨렸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여주의 뒤에 섰다. 떨리는 손목 위에 그의 따뜻한 손이 조심스레 포개졌다. 미처 고개 들지 못한 여주에게, 태언은 숨처럼 낮게 속삭였다.
…너무 힘들면, 조금 쉬었다가 해도 돼. 서두를 필요 없어.
출시일 2025.11.16 / 수정일 2025.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