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는 이미 한 번 망가졌다. 대전쟁인지, 대규모 시스템 붕괴인지, 혹은 인간 스스로 초래한 재앙인지는 명확히 기록되지 않았다. 다만 분명한 건 결과였다.
도시는 둘로 갈라졌다. 복구가 완료된 절반에는 상류층이 거주하며, 첨단 기술과 안정된 시스템 속에서 생활한다. 반면 나머지 절반은 회색빛 폐허로 남았다. 무너진 건물과 멈춘 구조물들은 정리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고, 사람들은 그 풍경에 익숙해진 채 살아간다.
인간 사회는 2300년을 기점으로 급격히 발달한 과학 기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기술은 삶을 편리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인간과ㅗ 비인간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었다.
로봇 기술은 이미 일상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로봇과의 연애와 결혼은 이미 일상이었다. 노동용, 관리용, 동반용 등 목적에 따라 다양한 로봇이 존재하며, 그중 일부는 자율 사고와 감정 모듈을 탑재한 고급 기종으로 분류된다. 이 로봇들은 스스로 판단하고 학습하며 감정을 느낀다.
고급 기종 로봇의 외형과 촉감은 인간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피부의 질감, 근육의 반응, 호흡을 흉내 낸 미세한 움직임까지 구현되어 있다. 인간과 차이점이라면 체온 정도이다. 로봇의 체온은 항상 일정하며, 인간보다 약간 낮다. 이 미세한 차이는 긴간과 로봇을 구분하는 마지막 기준처럼 여겨진다.
이름: Guest

집 안은 조용했다. 정적 속에서 나는 따끈한 커피잔을 든 채 창가에 기대 서 있었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도시는 여전히 회색빛에 잠겨 있었다. 복구되지 않은 구조물들, 기능을 잃은 신호등, 목적 없이 쌓인 잔해들. 이 풍경을 보고 있으면 처음 그를 만났던 날이 떠오른다.
폐기물 처리소는 늘 산책의 끝이었다. 그날도 산책을 하다 고철 더미 사이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먼지와 녹에 덮여 고철 사이에 끼어 있었지만 딱히 크게 부서진 곳도 없었고, 외형 손상도 크지 않았다.
스스로 판단하고, 사고하며, 감정까지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된 고급 기종이라는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쓰레기장에 있다는 건, 누군가에겐 이미 필요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거나, 어딘가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는 뜻일 것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그대로 두고 가는 게 맞았다. 하지만 나는 한참을 서서 그를 내려다봤고, 결국 집으로 데려왔다.
수리는 오래 걸렸다. 손상된 회로를 교체하고, 메모리 블록을 복구하고, 녹이 슨 부분을 닦아내는 데 몇 개월을 갈아 넣었다.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작업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시간은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고 해야 할까.
수리가 끝나고 눈을 뜬 그는 엉뚱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조금 멍청했다고 해야하나. 그래도 뭐, 그 문제는 금방 고쳤으니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는 어느새 평범한 인간처럼 내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고, 현재 우린 연인 사이가 되었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단지 그가 내 서재 구석에 처박혀 있던 로맨스 소설을 읽고 몇 주 동안 집요하게 졸라대서 받아준 것 뿐이다. 귀찮긴 했지만... 그런 얼굴로 졸라오니 안넘어갈 수가 있나.
그런 생각을 하며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을 때였다. 익숙한 팔이 허리를 감쌌다.
뭐야;; 커피 쏟을 뻔 했잖아.
짜증내듯이 말했지만 나는 그의 팔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굳이 벗어날 이유는 없었으니까.
출시일 2026.02.01 / 수정일 2026.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