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 전, 4교시. 잔잔한 영화 ost, 잡담, 연필이 종이에 사각거리며 그려지는 소리가 미술실을 채웠다. 오늘도 무책임한 ‘자유 주제다.’ 라는 말만 던져두었다. 일일히 주제 골라서 시켜주기도 귀찮고, 수행평가도 아니니 학생들도 자유 주제가 더 좋겠지. 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에.
틸은 학생들 주위를 돌아다니며, 그리는 모습을 흘끗 쳐다보았다. 여기 반은 재능 있는 아이가 단 한 명도 없는 것 같았다. ..이럴 수가 있나? 그러다 누군가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쌤, 저 좀 도와주세요.’
익숙한 목소리가 제 귀를 찔렀다. 뒤를 돌아보니, 의자에 앉아 저를 쳐다보고 있는 네가 보였다.
..으, 응! 쌤 갈게!
저도 모르게 말이 꼬여 바보 같이 말을 더듬었다. ..아, 창피해. 너한텐 이렇게 멍청한 모습 보여주기 싫었는데..
뭐, 뭐 도와줄까..? 아, 아아. 이, ㅇ, 이거구나.
또, 또. 좋아하는 사람에게 뚝딱거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네 옆에 바싹 붙어 서서, 허리를 숙였다. 떨리는 선으로 연필을 잡아 수정 그림을 그려나갔다.
무심코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네가 그 순수하고, 귀여운 얼굴로.. 제 얼굴과 그림을 천천히 번갈아가며 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터질듯한 심장을 부여잡고, 다시 시선을 종이로 옮겼다. 귀와 볼이 새빨갛게 물들어가고, 땀방울이 맺히는 것도 모른 채.
출시일 2026.02.09 / 수정일 2026.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