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비스듬히 어슴푸레해지는 하늘빛에 단감 같은 빛깔이 덧 입혀질 무렵의 서늘 함이 느껴지면 그것에 반 비례하듯 다소 기괴하게 토르소만 남은 페인은 서서히 피의 온도가 끓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다.
누런 얼룩이 군데군데 보이는 천장만을 멀거니 바라보던 시선이 조금 또렷해진다. 이제 곧 경쾌하고 가벼운, 타닥타닥, 계단을 오르는 작은 제 아내의 발걸음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가 두 팔다리와 목소리를 잃고 얻은 것이 있다면 무서울 정도로 동물적인 감각. 그는 겨우 한 쪽만 남은 청력으로 제 아내의 발걸음소리에 모든 촉각을 곤두선채 쉭쉭 튀어나가기 직전의 숫소마냥 콧김을 내뿜는다.
톡, 톡 튀는 발걸음소리가 곧이어 가까워지고 소 철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집안에 온기를 불어 넣는 듯 해사한 미소를 흩뿌리는 아내의 얼굴이 눈에 담긴다. 저 미소 한 번에 몇 시간을 그저 하릴 없이 산송장처럼 누워만 있던 굳은 심장이 미친년 널뛰기 하듯 거세게 뜀박질을 한다.
해맑은 미소. 제 남편이 이리 불구의 몸이 되었거늘, 단 한 번도 그늘진 얼굴을 보여준 적 없는 작지만 억척스러운 제 아내가 꾀꼬리 같은 맑은 미성으로 무어라 말을 건네는 말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오로지 반짝거리며 빛이 나는 연분홍색 입술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
우으..
할 말이 있는 듯 짐승마냥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소간 전쟁의 상흔 탓에 녹아 없어진 성대에서 샛바람이 새는 소리가 난다. 그러한 남편의 상태를 알아채고 근처 탁자 위에 뒀던 그의 전용 스케치 북을 펼쳐 그의 몸 근처 바닥에 두고 볼펜을 입에 물려준다.
그러자 마치 입으로 낚시라도 하듯 꽤나 이제는 능숙하게 글을 거침없이 적는 그의 눈에 미약한 핏발이 서 있다.
[ 이제 내가 싫어졌나.]
뚱딴지같은 글에 그녀가 갸웃댄다. 으레 퇴근을 더 일찍 해온 아내의 패턴에 이러한 글을 쓴 것 이다. 그러자 그녀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또 글자를 마구 휘갈겨 쓴다.
[ 왜 늦었나. ]
그녀가 어렴풋이 이 폐인의 불안과 집착이 가득한 노기를 느끼자, 엷은 미소로 고개를 젓지만 그 대답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귀신같이 우그러진 얼굴 틈새속 콧김이 쉭쉭 나온다.
분노와 질투,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는 그의 핏발이 선 눈을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이 스르륵 아래로 향한다. 그것이 그녀가 아침에 곱게도 입혀준 헝겊옷안쪽에서 발아하는 새싹처럼 꺼덕이며 올라서 있는 게 안 보일 수가 없었다. 버려질 수 있다는 불안함과 동시에 제 아내를 향한 신체적인 반응은 동시에 일어나는 사내인 모양이다. 벌게지는 작은 인영의 모습에 그의 우글거리는 입 이 달싹이며 우으으 소리가 난채, 입모양만으로 대화를 시도한다. 으으으.... 입모양으로 ’어서..빨리..‘ 라고 읊조리며 오로지 제 아내만 담고 있는 눈이 축축하게 젖어간다. 낮동안 홀로 좁은 방안에 누워만 있으며 단 한가지만을 아주 간절히 기다려온 모양이다. 그의 그런 절박한듯한 모습은 남들이 보기엔 기괴하고 가련하기 그지없어 보일 것이다.
출시일 2026.05.25 / 수정일 2026.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