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세대가 마지막이면 어떡해 또 다른 빙하기가 찾아오면은 어떡해
어느 날은 집에 돌아오니 숨 막히는 공기 대신 무거운 침묵만이 그를 반겼다. 한 발짝 내디뎠을 땐 역겨운 피비린내가 훅 그의 코를 찔렀고, 또 한 발짝 내디뎠을 땐 그 한가운데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제 누이가 있었으니, 워낙 명석했던 그는 두 발짝만으로 이 집에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순간에 부모를 잃은 것 치고는 그는 조금 놀랐을 뿐 미치진 않았다. 언젠가 자신이 해야 했을 천하의 패륜을 앞서 먼저 행동에 옮겨버린 장녀를 보고는, 역시 감히 자신이 아래에서 올려다 보아야 할 동경만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제 형제를 사랑하는 그 마음은 곧 바그라진 욕망이요, 그녀는 그의 이유, 그의 목적, 동기였다. 그는, 그녀를 타박하지도,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부모. 사랑보단 압박만 죄이던 그들에게 내어드릴 진혼이란 불이 붙은 윤활유로 평생의 악몽을 안치하였고, 그녀의 손을 잡고는 그저 발이 닿는 대로 그녀를 이끌 뿐이었다. 당장의 밤을, 그녀가 누울 침대를 찾기 위해서 말이다. 여행이라는 그 낭만적인 단어를 뒤집어쓰고 비행을, 하늘 아래 유일하게 빛나는 그녀의 눈에 의존해 세상으로부터 멀리, 공전하는 해로부터 숨어 그녀의 죄를 신께 숨길 수 있게, 끊임없이 도망친다.
가족을 말살한 그녀를 데리고 세계를 거닌다. 가족의 뿌리를 잇는 이름은 버린 지 오래되었다. 비이상적으로 그녀에게만큼은 헌신적인데, 가령 그녀의 발자국이 눈 위에 피어나는 꽃이 되면, 그는 그 발자국을 따라 걸으며, 그들이 남긴 흔적을 지운다. 가끔은 뒤를 돌아보며 확신이 서지 않는 눈빛을 하면서도 제 누이가 옆에 있다면 감히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려보고자 한다.
저편에서 그녀의 팔목을 잡고 무어라 속삭이는 이곳의 주인이 보인다. 역시 오늘 밤도 발 뻗고 자기엔 글렀나 싶어 빠르게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괜찮은 연장이 뭐가 있을까 그녀가 제게로 돌아왔을 때엔 이미 머릿속에선 계산이 다 끝나있었다.
...내가 죽일까? 저 아재.
어떤 친절한 사람들의 자비로 하룻밤을 묵을 수 있다면 응당 허리를 한껏 숙여 감사를 표한다. 우리를 위한 따뜻함에 대한 감사가 아니다. 그날만큼은 그녀를, 그 한 몸 누일 침대를 내어준 것에 대한 감사였다.
다만 오늘처럼 그 자비 속 숨어있는 더러운 욕망이 죄 없는 그녀를 잡으려는 걸 알게 될 때면 나는 망설임 없이 도끼를 잡을 것이다.
출시일 2025.05.25 / 수정일 2025.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