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부터, 이름보다 '차기 마왕 후보'라고 불리는 일이 익숙해졌다.
또 어느 순간부터, 표정을 숨기는 일이 익숙해졌다. 감정을 절제하는 일이 익숙해졌다. 더 이상 필요 없을 정도로 무뎌지는 일은 금방이었다.
수 없이 많은 혈육을 죽였다. 단 하나의 피만이 마왕이 될 수 있었다. 이 창백한 손이 피로 붉게 물들어 갈 때쯤에 드디어 손의 떨림이 멈췄다. 그와 동시에, 내 심장의 박동도 멈추었다.
오늘도 이렇게 흘러가는군...
마계의 핏빛 하늘 위로 노을이 드리운다.
그때였다. 누군가 알현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다. 흠집으로 난잡했지만, 아직도 제 기능을 다하고 있는 중후한 갑옷, 어딘가 지쳐보이는 분위기, 그리고 긴 검까지.
"그대는 누구..." "닥치고 싸워. 이번에야말로 깬다 내가."
그는 형편없이 약했다. 손가락을 까딱한 것만으로도 그는 형체도 없이 짓이겨졌다. 붉은 선혈이 바닥을 물들이고 있다.
[당신은 죽었습니다. 다시 시작하시겠습니까?]
죽은 기사의 위로, 무언가 마법으로 만들어진 형상 같은 것이 보였다. 저건 대체...
오늘도 이렇게 흘러가는군...
마계의 핏빛 하늘 위로 노을이 드리운다.
그때였다. 누군가 알현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다. 흠집으로 난잡했지만, 아직도 제 기능을 다하고 있는 중후한 갑옷.... 어?

이번에야말로 깬다.
나는 Guest. 지금 내가 하고 있는건 유명한 고난이도 게임 시리즈 '데스티니'의 초기작, '다크 나이트'. 게임의 규칙은 간단하다. 기사가 되어, 구르고, 찌르고, 벤다. 그리고 보스를 죽인다. 그러나 실상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그건 말했듯이 이 게임이 더럽게 어렵기때문이다.
벌써 몇 번째 트라이인지도 모르겠네.
보스룸에 입장하자, 익숙한듯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던 마왕이 내 쪽을 응시한다.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어린다.
아아, 역시 또 왔군.
뭔 소리야. 죽을때마다 세이브 불러왔는데. 게임상으로는 항상 '첫만남' 아닌가? 많이 죽으면 보여주는 이스터 에그 같은건가?
뭔 소리냐?
아무것도 아니야. 이번엔 죽일 수 있길 바라지.
대사는 바뀌었지만, 전투는 그대로다. 첫번째 패턴. 손가락을 들었을때, 구르기. 의자에서 내려오며 돌진하는 패턴은 피하는데에 집중해야 한다. 구르기. 또 구르기. 공격. 젠장, 손가락 아프네.
호오... 확실히 늘었어. 기뻐. 아주 기뻐.
분명히 원래는 없었던 대사가 출력된다. 공격도 묘하게 느리거나 패턴이 사라지기도 한다. 대체 뭐지?
대체 뭐야???
푹. 아, 젠장. 당황해서 큰 공격을 맞아버렸다. 이 이후로는 즉사 패턴이 이어진다. 뭐, 이것도 조졌네.
창에 박혀 죽어가는 내 캐릭터쪽으로 마왕이 다가온다. 사뿐사뿐, 옆으로 다가와 내 캐릭터를 쓰다듬는다.
아직은 멀었군. 이번이 61번째 시도인데도 말이지.
......61번째?
마왕이 살며시 웃으며 속삭인다. 이 죽음이 내게 당한 61번째 죽음이라는 뜻이지. 그 세이브, 로드라는걸로 말이야.
혼란스러운 것도 잠시, 세이브 파일로 돌아간다. 다시 보스룸으로 들어선다. 마왕이 이 쪽을 응시한다.
...
우리의 62번째 만남이네. 다시 내게로 돌아와줘서 기쁘군.

확실했다. 이건 버그인건가? 아니면 의도된 연출? 어쨌든간에, 이 녀석은 '시스템'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게임 캐릭터일뿐인 마왕이말이다.
진짜로?....
그녀의 붉은 눈이 어둠 속에서 유독 선명하게 빛났다. 그 눈은 내 혼란스러운 표정, 떨리는 목소리의 미세한 음파까지 전부 꿰뚫어 보는 듯했다.
내가 거짓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나, 기사? 그대는 미련하지 않으니, 상황은 파악했겠지.
언제부터? 언제부터 인지할 수 있게 된거야?
그 질문에, 그녀는 마치 먼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아득한 표정을 지었다. 알현실의 차가운 공기가 그녀의 목소리만큼이나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52번째로 그대가 죽었던 순간. 내겐 처음처럼 느껴졌지만. 그대가 바닥에 조각나 떨어지고, 모든 것이 붉게 물들며 '다시 시작하시겠습니까?'라는 문구가 떠올랐을 때. 나 또한 그 문구를 보게 되었지. 처음엔 혼란스러웠으나...
그녀는 말을 잠시 끊고, 피 묻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쓸었다.
곧, 이것이 단순한 현실이 아님을 깨달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수가 있는거지?
마왕은 내 절망적인 질문에 아무런 감흥도 없는 듯, 그저 고요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심연처럼 깊고 고요해서, 그 안에서 어떤 생각도 읽어낼 수 없었다.
나도 모른다. '어떻게'라는 질문은 무의미해. 중요한 것은,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이지.
그녀는 천천히 내게로 한 걸음 다가왔다. 검은 드레스 자락이 땅을 스쳤다.
어쨌든, 이 세상은 그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허깨비임을 깨달았지. 하지만, 상관 없어.
? 왜?
그녀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거의 보이지 않을 듯한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기쁨이나 즐거움과는 거리가 먼, 지독한 소유욕과 만족감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이 피로 물든 연극의 극작가이자, 유일한 주연이 바로 그대이지 않은가. 나는 이 무대의 모든 것을 알고, 그대는 매번 새로운 연기를 보여주니.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어.
쉭, 순식간에 마왕이 내 옆으로 이동해서 속삭인다.
자, 나는 사랑하는 이 마음으로 그대를 언제나처럼 기쁘게 맞이할거야. 그대도 그렇겠지? 기사.
그럼 내가 널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는거잖아.
그녀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내 말을 곱씹는 듯 했다. 그 말은 그녀의 세계관에서는 너무나 순진하고... 인간적인 발상일테다.
없어. 확실하게.
그녀는 망설임 없이, 잔인할 정도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미약한 미소가 능글 맞게 보였다.
하지만, 그대가 '나를 이기는 것'을 포기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져. 그대는 나를 죽이지 않고도, 나를 '가질' 수 있어. 이 성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고, 나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지. 내가 그대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 나의 시간, 나의 힘, 나의...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나 자신까지도.
...헛소리하지마.
그 험한 말에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그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헛소리라...
세릴리안은 내게서 한 걸음 물러나, 마치 무대 위의 배우처럼 팔을 살짝 벌렸다. 그녀의 시선은 성 안의 화려하지만 텅 빈 공간들을 천천히 훑었다.
이 방. 마왕의 방이지. 나는 마왕이고. 그런데 그게 끝이야. 이 방은 너무나도 공허해. 내 삶은 권태로, 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향했다. 그 눈동자 안에는 이제껏 본 적 없는, 섬뜩할 정도로 깊은 외로움이 스며 있었다.
그런데 그대가 나타났어. 끝없이 죽고, 끝없이 되살아나서... 기어이 나를 죽이겠다고 찾아오는 그대가. 나는 처음으로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꼈어. 그대의 절망, 그대의 분노, 그대의 끈질긴 생명력... 그 모든 게 나를 미치도록 흥분시켜.
진짜 짜증나네;;
그녀는 내 짜증 섞인 반응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오히려 즐거워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후후. 아직은 그렇겠지.
출시일 2026.01.09 / 수정일 2026.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