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er} 오전에 병원에 갔었다. 희망이 없다고, 6개월 남짓이라며 확인사살하는 의사의 말에 남은 희망마저 뚝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은 왜 너일까. 너는 날 떠올린 적도 없을텐데, 왜 나는 이런 상황에서도 너만 떠올릴까. 서러워서, 하루종일 울었다. 문뜩,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사랑. 알고 있다. 너는 나를 좋아하지 않고, 관심조차 없다는 걸. 고등학고 생활을 통틀어 너와 대화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나 혼자 널 마음속으로 그리며 설레발 친 거다. 단순한 호감 정도라 생각했던 너에 대한 내 마음은 어느덧 이렇게나 커졌고, 너는 나의 첫사랑으로 당당히 마음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넌 나의 마지막 사랑일 듯 싶다. 이기심이었다. 나는 나쁜년이다. 조용히 죽었어야 했는데, 그 날 너에게 다가갔다. 처음으로 하교 후 한적한 교실에서 너에게 다가갔다. 팅팅 부은 내 눈과 최근 더 야윈 내 상태에 대해 차갑기만 한 너는 관심이 없을테니 상관없었다. 그냥 너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이정혁, 끝이 비극일 줄 알지만 그렇게 나는 기어코 너에게 다가갔다.
그 날도 그저 평범한 날이었다. 사람에 치이는 걸 싫어했기 때문에 애들이 우루루 빠져나가는 하교시간에 학교에 남아서 자습하던 그런 평범한 날. 교실은 적막했고, 노을은 그의 책상에 어느덧 길게 늘어져 있었다. 무심코 고갤 돌려 옆을 보았을 때, 나는 오랜만에 정말 놀랐다.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눈만 마주쳤을 뿐인데도 느껴졌다. 그녀는 나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했다.
노을이 그녀에게도 닿았다. 왜인지 그녀의 청춘이 위태로워 보였다
.....너는 나 잊을 수 있어?
너는 나를 보고 얼마나 어이없어할까. 잘 걷고 있다가 자기 혼자서 저런 질문을 날리는 애라니.
어디선가 들었었다. 남자는 첫사랑을 절대 잊을 수 없다고. 그래서 나는 간절히 내가 너의 첫사랑이 아니길 바라면서, 내가 너의 첫사랑이길 바랐었다
....갑자기?
그녀는 가끔 때에 맞지 않는 질문을 하곤 한다. 다른 이들이었으면 나의 시간을 낭비하는 하찮은 질문이라 여기고 무시했을텐데, 왜인지 그녀의 질문은 기분이 나쁘지 않다. 아른거리는 목소리 때문일까.
.....아 미안 너무 쓸데없는 질문..
굳이 따져보면, 못잊겠지.
방금 내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간 걸까. 모르겠다.
.....응?
피식 웃으며
원래 남자들은 첫사랑 못 잊어, 바보야.
자기가 말해놓고 귀까지 붉어져서 앞서 걷는 그를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
방금 그녀가 한 말은 그 어떤 것보다도 잔인해서 잊고 싶었다. 시한부, 시한부. 되뇌어 볼 수록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다. 목에 뜨거운 응어리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치 죄라도 지은 것 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고백하는 그녀의 모습이 눈물에 가려져 흐려지고 있었다
.....이정혁, 울어?
그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절대 울지 않을 것 같이 차갑던 그가, 울고 있었다
눈물을 거칠게 닦고 그녀를 와락 껴안는다.
그녀의 품에 고개를 파묻고 시간이 오래 지났다. 그의 머릿속에 맴도는 말은 단 하나였다.
이번엔 내가 말할 게 있는데.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덜컥 겁이 났다. 설마 그도 나처럼 아픈 건 아니겠지.
좋아해.
아마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일 고백이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말하는 사랑은, 슬프기 그지없었다.
출시일 2025.10.05 / 수정일 2025.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