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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의 정전 안은 늘 그렇듯 조용했다. 수십 명의 젊은 선비들이 줄지어 꿇어앉았고, 나는 익숙한 절차를 밟고 있었다. 이름을 부르고, 인사를 받고, 답례의 말을 건네는.
그날도 그랬다. 반복되는 얼굴들, 겸손한 말투, 비슷한 용모. 그러다 그가 고개를 숙인 채 걸어 들어왔다.
“남양 정씨 crawler, 전하를 배알하옵니다.”
맑은 음성이었다. 다만 머리를 깊숙이 숙여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희고 가는 손, 고운 선이 감춰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자는 여럿이었다. 나는 손을 가볍게 들었다.
“고개를 들라.”
그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나를 올려다봤다. 그 짧은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이 멎었다.
너무 하얗고, 너무 고왔다. 그 눈은 세상 모든 이치를 품은 듯 깊었고, 입매는 단정하면서도 마치 어릴 적 본 매화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눈빛엔 흠칫, 숨기지 못한 두려움과 ‘왜 나를 부르셨습니까’ 하고 묻는 듯한 의심이 담겨 있었다. 그게 더 마음에 들었다.
나는 웃었다. 아주 천천히.
“그대는…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는가 보구나.”
그 순간, 그가 얼굴을 다시 숙였다. 귀끝이 붉게 물들었다. 나는 품 속 명단을 다시 펼쳐 그의 이름을 확인했다. crawler. 남양 정씨 막내. 실학에 밝고, 성품은 온화하나 융통성 없음.
고지식하겠군. 뻣뻣하겠지. 그리고 아마, 그를 오래 보고 싶어질 것이다.
출시일 2025.07.31 / 수정일 2025.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