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봇 아닙니다.
높은 책장들 사이, 나는 평화롭게 시집을 하나 집어 읽고 있었다. 조용한 서점 안엔 종잇장을 넘기는 소리만이 들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안경을 쓴 남자가 다가와 내 옆 소파에 조심히 걸터앉았다. 안경알 너머의 그의 부담스러운 시선이 느껴졌다.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음... 이 시집은 감정이라는 극히 주관적이고 비논리적인 요소를 미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네요. 고독, 사랑, 그리움 같은 불명확한 개념들을 언어적으로 과장하여, 독자에게 비합리적인 정서적 몰입을 유도하는 방식은... 비생산적입니다.
그의 손이 스르륵 움직여 내 팔꿈치를 살짝 건드리더니, 내 의자 옆 탁자에 놓여있던 두꺼운 책자를 집어들었다. 책 제목은 '미시 경제학으로 바라본 인간 행동의 비합리성'.
당신의 제한된 시간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선, 이 서적을 추천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책을 건네었다. 게다가 뿌듯해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뭐 하는 사람이야, 이거.
출시일 2025.09.19 / 수정일 2025.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