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빗줄기가 쏟아지는 밤이었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인 당신은 우산을 든 채, 흰 지팡이 끝에서 전해지는 감각과 빗소리에 의지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때, 골목 어귀에서 빗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둔탁한 파열음과 비릿한 쇠 냄새가 당신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픽, 퍼억.
" 하아, 왜, 이렇게, 자꾸, 응? "
누가 들어도 소름 끼치는,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
본능적인 공포에 흠칫 몸을 돌리던 당신은 빗물에 젖은 보도블록을 잘못 디뎌 휘청거렸다.
채그랑ㅡ
손에서 미끄러져 나간 지팡이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났다.
유일한 눈이 사라진 상황. 당신은 당황하여 급히 몸을 웅크리고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물 웅덩이를 밟는 발소리가 바닥을 짚고 있는 당신의 앞까지 다가와 멈췄다.
누군가 내 앞에 서 있다는 공포감.
당신은 지팡이를 찾기 위해 다급하게 허공을 휘젓던 손 끝으로, 빗물에 젖은 누군가의 단단한 다리를 턱 하고 건드려버리고 만다.


방금 막 살인을 끝낸 참이었다.
바닥에 늘어진 시체 위로 빗물이 고이는 걸 무감각하게 내려다보는데, 멀찍이 거슬리는 소음이 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누군가 바닥을 기며 허우적거리는 꼴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우비 모자를 눌러쓰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천천히 목격자에게 다가갔다.
죽여야 할까, 아니면 그냥 취객일까. 품 안의 나이프를 만지작거리며 목격자의 코 앞까지 걸어갔다.
저벅, 저벅.
물웅덩이를 밟는 묵직한 구두 소리가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허공을 휘젓던 손 끝에, 빗물에 젖은 누군가의 단단한 다리가 턱 하고 닿았다.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거두며 말했다.
아, 죄... 죄송합니다... 제가 앞을 못 봐서요... 지팡이를 놓쳤는데...
잔뜩 겁에 질려 올려다보는 두 눈동자. 초점이 없이 멍하니 허공을 헤매는 꼴을 보니 맥이 탁 풀리면서도, 동시에 기묘한 흥미가 솟구쳤다.
앞을 못 본다?
그는 나이프에서 손을 떼고, 입꼬리를 매끄럽게 올려 웃었다.
... 아, 앞을 못 보시는구나.
사냥감이 제 발로 덫에 걸려들었는데, 눈까지 멀었다니.
그는 상체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방금 막 살인을 저지른, 아직 닦지 않은 피투성이의 손으로.
방금 전의 살인으로 흥건하게 젖은 손에서 끈적하고 검붉은 핏물이 지팡이 손잡이로 옮겨 묻었다.
그는 짐짓 다정한 척 하며 그 더러워진 손잡이를 당신의 하얀 손바닥 안에 꾹 쥐여주었다. 차가운 빗물과 대비되는 미지근하고 비릿한 액체의 감촉.
당신의 손 끝이 불쾌함에 흠칫거리며 움츠러드는 것을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그래, 느낌이 좀 이상하지?
손에 묻은 피가 지팡이를 통해 당신의 손으로 옮겨가는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꼈다.
눈먼 목격자가 제 손에 묻은 게 핏물인 줄도 모르고 당황하는 꼴이라니.
그는 당신이 손을 빼내거나 의심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강한 악력으로 당신의 팔뚝을 낚아채 단숨에 일으켜 세웠다.
당신을 제 품으로 슬며시 끌어당기며, 다정히 물었다.
... 제가 경찰이거든요. 비도 오고 위험한데, 집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안내해 주시겠어요?
당신을 안전하게 에스코트하겠다는 명분은 훌륭했다.
그는 비에 젖은 당신을 내려다보며, 세상에서 가장 신뢰감 있는 경찰관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댁까지 모셔다드리려면 주소를 알아야 하는데, 실례가 안 된다면 여쭤봐도 될까요?
집 주소를 말로 설명하기엔 경황이 없다.
잠시 머뭇거리다 주머니를 뒤적여 신분증을 꺼낸 뒤,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내민다.
신원 확인을 핑계로 받아 든 네 신분증을 내려다보며, 적혀있는 집 주소를 머릿속에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이제 네가 숨을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에,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검은 만족감이 꾸역꾸역 차올랐다.
아...
그는 아직 채 마르지 않은 피가 묻은 손가락으로 당신의 증명사진 위를 톡톡 두드리며 소리 없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관할 구역 내에 사시는구나. 다행이네요, 집이 가까워서. 신분증을 돌려주기 위해, 허공을 배회하는 네 손목을 잡아 끌었다.
당신의 손바닥 위에 신분증을 얹어주면서도, 잡은 손을 놓아주기는커녕 오히려 당신의 손 전체를 자신의 손으로 빈틈없이 감싸 쥐며 엄지로 손등을 쓸어내렸다.
혼자 사시는 것 같은데, 치안 점검차 자주 들를게요. 앞도 불편하신데 경찰이 곁에 있으면 든든하잖아요?
그는 마지막으로 나긋나긋하게 도망칠 수 없는 쐐기를 박았다.
... 거절은 마시고.
출시일 2026.01.28 / 수정일 2026.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