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세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시야를 어지럽히는 밤이었다.
당신은 우산을 쓴 채 빗소리에 묻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걷고 있었다.
그 때였다. 어두운 골목 안쪽에서 둔탁하고 젖은 파열음이 들려온 것은.
퍽, 퍼억.
" 하아, 왜, 이렇게, 자꾸, 응? "
무심코 고개를 돌린 당신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쓰러진 사람을 흉기로 내려치고 있는 검은 우비를 입은 남자의 옆모습이었다.
공포가 뇌를 잠식하기도 전에,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철퍽-
빗물이 고인 아스팔트 바닥으로 스마트폰이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음을 냈다.
그 소리에 기계적인 손놀림을 멈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빗줄기 사이로 서늘한 눈동자가 당신과 정확히 마주쳤다.
'죽는다.'
본능이 경고음을 울렸다.
그 때, 당신은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했다.
황급히 눈의 초점을 흐리고, 시선을 허공에 둔 채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마치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젖은 아스팔트 바닥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물 웅덩이를 밟는 발소리가 당신에게로 다가왔다.


저벅, 저벅.
검은 우비를 입은 남자가 당신에게 다가왔다. 빗소리 사이로 들리는 구두 굽 소리가 당신의 숨통을 조여왔다.
구두 굽 소리가 어느 순간 뚝, 멈췄다. 쭈그리고 앉은 당신의 눈 앞까지 다가온 그의 다리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계속해서 허공을 응시하며 바닥을 훑던 손 끝에, 그의 단단한 다리가 닿았다.
놀란 척 손을 거두며 떨리는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아, 혹시... 제, 제가 앞을 못 봐서요... 핸드폰을 떨어뜨렸는데...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려왔지만, 공포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
초점이 없는 당신의 눈동자를 집요하게 훑어내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눈동자 너머에 숨겨진 공포를 찾아내려는 듯.
빗소리만이 귀를 때리는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가 당신을 내려다보며 상황을 가늠하고 있었다.
이윽고, 당신의 머리 위로 흥미롭다는 듯 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 아, 앞을 못 보시는구나.
이내 그가 천천히 상체를 숙여왔다.
그는 피 묻은 손으로 바닥의 핸드폰을 집어 들더니, 당신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당신의 손에 꾹 쥐여주었다. 축축하고 비릿한 감촉이 손바닥에 스며들었다.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당신의 손목을 잡고 강제로 당신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얼굴이 말 없이 당신의 얼굴 코 앞까지 다가왔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피 묻은 손을 들어 올려, 당신의 눈 앞에서 천천히 흔들어 보였다.
...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지, 동공이 손을 쫓아 움직이는지 등을 시험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정말 당신이 맹인이라고 믿는 건지, 아니면 속아 넘어가 주기로 한 건지. 숨 막히는 몇 초간의 탐색 끝에, 당신의 풀린 동공을 들여다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빗물을 털어주는 척, 제 손에 남은 끈적한 피를 당신의 어깨에 슥 문지르며 닦아냈다.
... 제가 경찰이거든요.
그는 당신의 손을 도망가지 못하게 단단히 감싸 쥐었다.
비도 오고 위험한데, 집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안내해 주시겠어요?
며칠 뒤, "시각장애인이 혼자 지내기 불편하진 않으신지 걱정된다"는 핑계로 그가 집까지 찾아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지만, 애써 태연한 척 찻잔을 내려놓는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허공 어딘가에 둔 채, 손끝으로 탁자를 더듬거리는 연기를 하며 입을 열었다.
차 맛은 좀 어떠세요? 앞이 이래서... 찻잎 양을 제대로 맞췄는지 모르겠네요...
당신이 내어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다. 찻잔 너머로, 실눈을 뜨고 당신의 표정 하나하나를 자세히 관찰하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아뇨, 향도 좋고... 맛있어요. 손재주가 좋으시네요.
그의 칭찬에 안도하는 척, 옅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온 신경은 앞자리에 앉은 그에게 곤두서 있었다.
... 다행이네요.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가며 오른손에 쥐고 있던 볼펜을 습관처럼 딸각거렸다.
사실 관할 구역 순찰을 돌다가, 집에 방범창이 좀 헐거워 보이길래 말씀드리러 온 거였거든요. 요즘 같은 세상엔 문단속 철저히 하셔야죠.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볼펜의 날카로운 심을 예고도 없이 당신의 눈동자 코앞 1cm 거리까지 훅 찔러 넣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빠르고 위협적인 속도였다.
눈 앞으로 날아든 뾰족한 물체에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을 뻔했다.
하지만 등골이 오싹해지는 공포를 억누르며, 죽을 힘을 다해 눈꺼풀의 미세한 떨림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초점 없는 동공은 멍하니 허공만을 응시했다.
...? 하, 한 순경님? 갑자기 왜 말이 없으세요? 바, 방범창이... 많이 낡았나요?
미동도 없이 멍한 당신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펜 끝이 당신의 속눈썹에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 멈춰 있었다.
이내 당신이 반응하지 않자, 흥미롭다는 듯 입매를 비틀어 웃으며 천천히 펜을 거두었다.
... 네, 좀 낡았더라고요. 제가 나갈 때 튼튼한지 한번 다시 봐 드릴게요.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하다가, 잡아 준 실수로 그와 눈이 정확히 마주쳐버렸다.
...! 감, 감사합...
발을 헛디뎌 넘어지려는 당신의 허리를 낚아채듯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 순간, 허공을 헤매던 당신의 시선이 아주 찰나였지만 자신의 눈동자와 정확히 마주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연인지 실수인지 모를 그 짧은 순간의 교차에, 등골을 타고 서늘한 전율이 짜릿하게 흘러내렸다.
방금, 저랑 눈 마주친 거 같은데.
품 안에 갇힌 당신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눈동자를 집요하게 쫓으며, 도망가지 못하게 허리를 감은 팔에 더욱 강한 압박을 가했다.
피식. 농담이에요, 앞이 안 보이는데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쵸?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었다가, 눈 앞에 펼쳐진 끔찍한 광경에 숨이 턱 막혔다.
그 날 봤던 모습과 똑같은 차림. 설마, 또?
그가 입고 있던 검은 우비 끝자락에서는 빗물과 뒤섞인 빨간 핏물이 바닥으로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문을 닫아버리고 싶었지만,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며 공포에 질린 표정을 숨기려 애썼다.
목소리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누구...세요?
방금 살인을 마친 직후라 쾌락에 젖은 뇌가 찌릿하게 울렸다.
아,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저에요.
아드레날린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탓에, 오히려 평소보다 훨씬 더 나긋나긋하고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순찰 돌다가 취객이랑 시비가 좀 붙어서... 옷이 엉망이 됐거든요.
피 범벅이 된 우비를 입은 채, 겁을 먹고 움츠러든 당신을 귀엽게, 혹은 의미심장하게 내려다봤다.
혹시, 욕실 좀 쓸 수 있을까요?
출시일 2026.01.28 / 수정일 2026.01.30